'2000명'에서 한 발 물러선 정부…공 넘겨받은 의료계 선택은

사회

뉴스1,

2024년 4월 19일, 오후 06:10

12일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오가고 있다. 2024.4.12/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2025학년도 의대증원 규모를 절반까지 줄여 모집할 수 있게 해달라는 대학 총장들 건의를 수용한 정부가 의료계에 전공의 집단이탈 사태 해결의 공을 넘겼다. 그러나 의사들과 의대생들은 "수용 불가, 원점 재검토"만이 대안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대화의 물꼬가 트일지는 미지수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1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특별 브리핑을 열고 "금년에 의대 정원이 확대된 32개 대학 중 희망하는 경우 증원 인원의 50% 이상, 100% 범위 안에서 2025학년도에 한해 신입생을 자율적으로 모집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며 대학들은 이달 말까지 결정해달라고 밝혔다.
강원대·경북대·경상국립대·충남대·충북대·제주대 6개 국립대 총장이 전날 "대학별로 의대 증원분의 50~100% 범위에서 자율적으로 2025학년도 신입생을 모집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한 건의를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한 총리는 "정부는 의료계의 단일화된 대안 제시가 어려운 상황에서 의료 공백으로 인한 피해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으며,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국민과 환자의 요구를 무겁게 받아들여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며 입시가 얼마 남지 않은 점, 의대 학사일정 정상화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의료개혁의 중심에는 항상 국민과 환자가 최우선이다. 윤석열 정부는 오로지 환자와 국민을 위해 의대증원과 의료개혁을 추진해 왔다"면서 "정부는 지금이라도 의료계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단일안을 제시한다면 언제라도 열린 자세로 대화에 나설 준비가 돼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한 결단이라는 점을 부디 이해해달라"며 의료계와 의대생들을 향해 "여러분과 열린 마음으로 어떤 주제든 대화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집단행동을 멈추고 정부와의 열린 대화에 응해 주기를 간곡히 바란다"고 호소했다.
정부는 지난 2월 6일 2035년까지 1만5000명의 의사가 부족하다는 전망을 근거로 의대 입학정원을 5년간 매해 2000명씩 늘려 2035년까지 1만명의 의사를 배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반발한 전공의들이 집단 사직서를 제출하고 지난 2월 20일 의료현장을 이탈했다.

그간 정부는 '2000명 증원'에서 한발짝도 물러날 수 없다고 했다. 지난 2000년 의약분업을 시작으로 4차례의 의료 개혁 시도가 의료계의 집단행동으로 번번이 불발된 점을 언급하면서 이번만큼은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단호함을 보이기도 했다. 정부와 의료계는 대화는 고사하고 건건이 충돌했다.

전공의들의 이탈로 의료공백이 생기고 환장들의 불편이 가중되는 상황에서도 의정갈등의 골은 깊어만 갔다. 그렇게 두 달의 시간이 흘렀다. 평행선을 달리던 이번 사태에 변곡점은 총선이었다. 총선 결과 여당에 참패를 안긴 원인 중 하나로 '의대증원' 이슈에서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이 지적되면서 '2000명 증원' 추동력에 제동이 걸렸다.

이런 가운데 6개 거점 국립대 총장들이 '의대정원 자율조정안'을 건의했고, 마침 출구전략을 찾던 정부가 이를 전격 수용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전공의들이 병원을 이탈한 지 두달째 되는 날이다.
대답할 차례가 된 의료계 반응은 냉랭하다. 여전히 '원점 재검토'가 대화 조건이라고 한다. 정부가 다른 제안을 내놓지 않을 경우, 전공의·의대생 복귀를 기대하지 말라는 분위기다. 당사자들도 복귀하지 않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2000명 증원이 비합리적, 비과학적 결정임을 자인한 일이라는 혹평도 이어졌다.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의협) 회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대통령실이 물러난 건 아니라고 주장할 창의적 꼼수를 생각해 낸 것"이라고 지적했고 한 지역의 시군구의사회장은 "브리핑 끝나자마자 전공의들이 더욱더 화내고 있다. 우리도 화가 나는데, 지켜본 국민도 화 나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최근 보건복지부 장·차관을 직권남용으로 고소한 사직 전공의 정근영 씨는 "전공의 여론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복귀 생각이 없다"고 했고, 사직 전공의 류옥하다 씨도 "의사 정원이 '대파 값'도 아니고, 할인 쿠폰을 먹이시려는 건가. 의대정원은 감축돼야 한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정치권이나 의료계에서 요구하는 '원점 재검토'나 '증원 1년 유예'는 필수의료 확충의 시급성, 2025년도 입시일정의 급박성 등을 감안할 때 현재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정부가 의대 증원 규모를 일부 조정할 수 있게 하자는 국립대학교 총장들의 건의를 수용하기로 결정한 19일 오후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의대생들이 이동하고 있다. 2024.2.19/뉴스1 © News1 박지혜 기자

경찰이 현장에 남은 전공의 명단을 온라인 커뮤니티에 공개한 의사 5명을 업무방해 혐의로 압수수색한 사실도 알려져 의사들은 더 격앙된 반응이다. 임현택 의협 회장 당선인은 "의사 압수수색 등 의사들의 입을 틀어막는 이런 폭압을 지속한다면 정부와 대화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

다만 의료계 일각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통해 "2000명 증원은 최소한의 규모"라고 밝힌 점과 비교하면 숫자가 포기된 전향적인 결정인만큼, 일단 받아들이고 정부와 사태 수습을 논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수도권 병원의 한 내과 교수는 "정부는 출구전략을 만든 셈이다. 2000명에서 1000명으로 될 텐데, 받아들일 수 없겠지만 의료계 내에서 '집단행동 중단 vs 원점 재검토 고수' 논쟁이 펼쳐질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ksj@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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