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의 돈키호테, 55년 피와 땀으로 숲의 전설 일궜다

사회

이데일리,

2025년 6월 05일, 오전 05:45

산과 숲의 의미와 가치가 변화하고 있다. 가치와 의미의 변화는 역사에 기인한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황폐화한 산을 다시 푸르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어렵고 힘든 50년이라는 혹독한 시간을 보냈다. 산림청으로 일원화된 정부의 국토녹화 정책은 영민하게 집행됐고 불과 반세기 만에 전 세계 유일무이한 국토녹화를 달성했다. 이제 진정한 산림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산림을 자연인 동시에 자원으로 인식해야 한다. 이데일리는 지난해 산림청이 선정한 대한민국 100대 명품 숲을 탐방, 숲을 플랫폼으로 지역 관광자원, 산림문화자원, 레포츠까지 연계해 지역 경제 활성화에 미치는 영향을 모두 100회에 걸쳐 기획 보도하고 지역주민들의 삶을 조명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류형열 북상임산 대표의 자택 앞 공터에서 촬영한 남덕유산 전경. (사진=박진환 기자)
[거창=이데일리 박진환 기자] 덕유산(德裕山)은 경남 거창·함양군과 전북 무주·장수군에 걸쳐있는 명산이다. 주봉인 향적봉(1614m)을 중심으로 해발 1300m안팎의 장중한 능선이 남서쪽을 향해 장장 30여㎞에 뻗쳐 있다.

북덕유에서 무룡산(1491m)과 삿갓봉을 거쳐 남덕유(1507m)에 이르는 주능선의 길이만도 20㎞가 넘는 거대한 산이다. 1975년 대한민국 10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이 중 경남 거창 북상면에 위치, 백두대간의 분수령을 이루는 남덕유산은 조선 시대에는 봉황산(鳳凰山) 또는 황봉(黃峯)이라고 불렸다. 지리산 다음으로 넉넉하고 덕이 있다고 해 덕유산이라고 했으며, 덕유산의 연봉들이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다고 해 남덕유산이라고 했다.

3대강의 발원샘을 갖고 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왜구들과 싸웠던 덕유산 의병들이 넘나들었던 육십령은 금강(錦江)의 발원샘이며 정상 남쪽 기슭 참샘은 진주 남강(南江)의 첫물길이 되며, 북쪽 바른 골과 삿갓골샘은 낙동강(洛東江)의 지류 황강(黃江)의 첫물길이다.

류형열 북상임산 대표가 식재한 50년생 잣나무. (사진=박진환 기자)
◇류형열 북상임산 대표, 55년간 271㏊ 규모 숲 가꿔…잣나무 등 74만본 식재

경남 거창군 북상면에 위치한 남덕유산 자락에는 한 독림가가 인생을 바쳐 만든 명품 잣나무숲이 자리잡고 있다.

여의도 면적에 달하는 271㏊ 규모의 명품숲을 조성한 주인공은 바로 류형열 북상임산 대표(86)이다. 류 대표는 이 숲을 55년 가까이 혼자 힘으로 가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독보적인 독림가이다.

숲가꾸기 규모도 435㏊로 개인 산주로는 국내 최고의 모범독림가에 속한다. 그는 이 일대에 잣나무와 낙엽송, 우산고로쇠나무 등 74만그루를 심었다.

류 대표는 동아대에서 화학을 전공한 뒤 1966년부터 거창여고에서 과학교사를 하다가 이듬해 당시 대기업이었던 마산의 한일합성섬유 연구실 책임자로 입사했다.

그는 기계 구입을 위해 일본과 독일을 자주 방문했고, 당시에도 임업선진국이었던 이들 나라의 울창한 숲에 주목했다.

특히 일본 교토의 아름다운 산과 숲은 그의 마음을 흔들었고, 일제의 수탈과 한국전쟁으로 민둥산이 된 우리나라의 산들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류 대표는 이때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으로 출장을 가면 보통 교토에 3개월 정도 체류를 하는데 울창한 숲과 산을 보고 놀랐다. 당시 한국은 전쟁 이후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나무도 난방용으로 다 캐다 보니 산에 진짜 나무가 하나 없이 풀만 자랐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면서 “심지어 농사를 짓기 위해 몇년에 한번씩 산에 불을 지르는 주민들도 적지 않았다”며 “나무 하나 없이 풀만 있는 우리나라의 산과 달리 울창한 숲을 보니 내가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조림을 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경남 거창 북상면 남덕유산 자락 류형열 대표의 산 입구에 설치된 대한민국 100대 명품숲 표지석. (사진=박진환 기자)
◇젊은 시절 독일과 일본 등 임업선진국 방문서 울창한 숲에 주목…국토녹화 동참

류 대표는 전자제품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던 부인을 설득해 돈을 융통하기 시작했고, 이 자본으로 현재의 산을 매입했다.

당시 1970년대 초반 경남 마산은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역경제에 활기가 넘쳤고, 류 대표의 부인이 운영하던 전자제품 대리점도 냉장고와 TV 등이 불티나게 팔리면서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경제적 여유가 생길만한 시기였지만 1969년부터 류 대표는 산 매입과 조림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직장 생활과 병행해 매주 주말이면 산에 살면서 나무를 심고 또 심었다.

이후 정부는 1973년부터 국토녹화사업을 시작했고, 전국의 모든 산주에 묘목을 배부했다.

당시 정부가 계획한 수종은 70%를 잣나무로 정했고, 편백나무와 낙엽송 등을 지역별로 안배했다.


그러나 나무는 정부에서 줬지만 인건비의 50% 이상은 개인 부담이었고, 류 대표는 사재를 털어 이 비용을 충당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나무만 심은 것은 아니었다.

이미 독일과 일본 등 임업선진국의 사례를 연구한 류 대표는 경제림을 조성하기 이전에 이미 임도의 중요성을 간파했고, 자신이 소유한 산에 임도를 깔아 조림과 사유림 경영에 이를 활용했다.

그가 조성한 임도는 나무를 식재하는 것은 물론 수년 후 잣나무에서 수확한 잣을 유통하는 등 산림 경영의 핵심이자 기반이 됐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직장생활을 하고,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에는 산에서 나무를 심는 일은 계속됐고, 주변에서는 류 대표를 ‘돈키호테’라고 불렀다.

류형열 북상임산 대표가 자신이 식재한 잣나무숲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박진환 기자)
◇동탑산업훈장 수여에 이어 모범독림가·이달의 임업인·대한민국 100대 명품숲 선정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이 산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품숲으로 성장했고, 류 대표의 조림 역사는 그에게 모범독림가라는 칭호를 안겼다.

산림청은 2022년 11월 ‘이달의 임업인’으로 류 대표를 선정했고, 2023년에는 이 숲은 대한민국 100대 명품숲으로 지정했다.

이에 앞서 2008년에는 국가산업발전 산림사업 유공으로 ‘동탑산업훈장’을 수여했다.

유 대표는 지금까지 단 한 그루의 나무도 베지 않았다고 했다. 자식처럼 기른 나무를 차마 벨 수 없어서다. 대신 나무들 사이사이에 산나물과 약초, 버섯 등 12가지 임산물을 재배했다.

계곡에는 고로쇠를 심어 1년 내내 청정한 임산물을 수확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매년 수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지만 대부분 수익을 산에 재투자하고 있다.

영광과 보람 뒤에는 감춰진 슬픔도 있었다.

류 대표의 장남이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백혈병으로 세상을 먼저 떠난 것이다. 그는 “산에 미쳐 사는 동안 큰 아이가 아픈줄도 몰랐고, 백혈병 진단을 받은 지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죄책감에 힘든 시간을 보냈다”면서 “그래도 참회와 함께 사명감이 다시 일어설 힘을 주었고, 조림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됐다”고 전했다.

그러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대기업에 다니던 둘째 아들도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떠나면서 자식을 먼저 보내는 ‘참척지통(慘慽之痛)’의 고통을 또 겪어야 했다.

류 대표는 “당시 둘째는 ‘조금만 있으면 임원으로 승진하고, 몇년후 퇴사해 아버지 일을 돕겠다’고 했다. 아들과 함께 산을 가꾸는 일에 작은 행복이 밀려왔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며 두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아쉬움, 슬픔을 숨기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손주들에게 거는 기대는 남다르다. 그는 “손주들이 어느정도 크면 나무 종자를 키우는 것부터 심는 것, 하나하나 모든 것을 알려주려고 한다”며 “대를 이어 함께 숲을 가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때 비로서 행복을 느낀다”고 전했다.

산림녹화를 성공시킨 그에게도 정책적 아쉬움은 있다. 최근 기후변화 등으로 산불이 자주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임목재해보험을 시행하지 않고 있다.

경제적 가치가 있는 나무를 키우는 데 최소 30년이 걸리지만 산불이 나면 보상받을 길이 없어 산불로 인한 임업인의 재산 피해를 막기 위해 재해보험과 같은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류 대표는 “산림청과 지자체 등이 숲가꾸기 사업 등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중간 조직을 거치지 않고, 조림 당사자에게 직접 사업비를 지급하는 방식 등 정책적 유연함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