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일 서울 서교동의 '고수포차'에 아이돌 그룹 멤버들의 사진이 붙어 있다. 2025.8.25/뉴스1 © News1 송송이 기자
"K팝 '휀걸'(Fan Girl)에게 하나의 코스예요. 내 아이돌의 '생일 카페'에 갔다가, 같이 덕질하는 사람들이랑 술집 와서 무대 영상 보고 아이돌 이름 붙여 소주 라벨 만드는 게요. 이후에 노래방 갈 때도 있고요."
최근 박다예 씨(23·여)는 같은 아이돌을 좋아하는 '덕질 메이트'(덕메)와 서울 마포구 합정동 일대에서 하루를 보냈다. 보이 그룹 '보이넥스트도어'의 멤버 태산의 생일 맞아 생일 카페를 연달아 방문하고, K팝 성지라 불리는 '고수포차'에 가서 무대 영상을 보며 덕메와 술도 마셨다.
박 씨는 "K팝 팬들에게 잘 알려진 가게들이 있는데, 그곳에 가면 사장님들이 덕질을 한심하게 보시지도 않고 오히려 덕질(팬 활동) 편하게 하라고 배려해 주셔서 마음이 편하다"며 "요즘은 이렇게 덕메들이랑 같이 생일 카페도 가고, 술집 가서 우리 애들 영상도 보고, 인형 들고 사진 찍는 게 하나의 당연한 코스가 됐다"며 웃었다.

'X' 갈무리
생일 카페부터 '덕후' 술집까지…"관심사 같으니 말도 잘 통하죠"
31일 뉴스1 취재를 종합하면, K팝 팬들을 떳떳한 소비자로서 인정하고 이들의 덕질에 친화적인 카페·식당 등이 인기다. 팬들은 과거 콘서트만 다니던 문화에서 벗어나, 덕질하기 좋은 카페·식당·술집·노래방 등을 함께 방문하는 하나의 '코스'를 형성하는 모습이다.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과 합정역 일대는 대표적으로 아이돌 팬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이곳엔 아이돌의 생일이 되면 팬들이 직접 기획해 공간을 대관해 여는 생일 카페들이 밀집해 있다. 9월 1일 방탄소년단(BTS) 정국의 생일을 앞두고 동교동·서교동에만 10여개의 생일 카페가 열렸다.
지난 25일 취재진이 찾은 합정역 일대는 보이 밴드 '데이식스' 도운의 생일을 맞아 열린 생일 카페들로 가득했다. 도운의 생일 카페엔 데이식스의 노래들이 울려 퍼지고 있었고, 내부는 도운의 사진과 굿즈, 인형 등으로 꾸며져 있었다.

25일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에 보이 밴드 데이식스 멤버 도운의 사진이 붙어 있다. 2025.8.25/뉴스1 © News1 송송이 기자
생일 카페도 일반 카페처럼 음료를 팔지만, 굿즈 등을 음료와 함께 주거나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이날도 20대 여성 4~5명이 무리 지어서 카페에서 파는 키링과 포스터, 스티커 등을 구매하거나, 도운에게 쓰는 편지를 작성 중이었다. 팬들은 도운의 사진이 붙어있는 종이컵을 수령하곤, 음료는 따로 들기도 했다.
도운의 팬인 이채은 씨(29·여)는 각 생일 카페마다 있는 '럭키드로우'를 위해 합정 일대 생일 카페를 돌고 있었다. 이 씨는 트레이딩 카드(수집 목적으로 제작되는 카드), 카라비너 키링을 받았다며 빙긋 웃었다.
도운의 생일 카페가 마련된 '클로버' 카페를 찾은 이 씨는 "카페 오픈하면 물건이 금방 빠져서 럭키드로우는 보통 오후 2시 넘으면 없어지기 때문에 빨리 와야 한다"며 "아티스트의 생일을 직접 축하해줄 수가 없으니 팬들끼리 모여서 카페와서 인형이랑 사진 찍고, 굿즈도 얻을 수 있어서 방문했다"고 말했다.
대구에서 올라왔다는 안 모 씨(30·여)는 도운의 생일 카페를 방문할 겸, 놀기도 할 겸 서울에 왔다고 말했다. 안 씨는 "연예인을 못 보더라도, 팬들끼리 생일을 축하하면서 즐기고 친목도 한다"며 "원래 알던 팬들끼리 같이 밥도 먹고, 혼자 오면 또 다른 분들이랑 친해지기도 한다. 관심사가 같아서 대화가 잘 된다"고 설명했다.

25일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보이밴드 데이식스 멤버 도운의 굿즈를 받은 팬의 모습. 2025.8.25/뉴스1 © News1 송송이 기자
직캠 보고, 'OO처럼' 소주 먹는 술집도…"아이돌 팬 대한 색안경 벗었으면"
합정에 있는 생일 카페를 방문한 팬들은 저녁이 되면 '고수포차'로 향한다. 합정역 인근에 위치한 고수포차는 일반 술집과는 달리, 아이돌 팬들에겐 덕질에 친화적인 환경과 사장님으로 유명하다.
취재진이 방문한 고수포차는 들어가는 계단부터 보이 그룹 '세븐틴'의 멤버들의 사진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내부에 들어서자 각 팬덤의 응원봉들과 세븐틴 멤버들의 사진 등이 전시돼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가게 내 2개의 스크린에선 끊임없이 아이돌들의 직캠과 무대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테이블엔 '뮤비(뮤직비디오), 직캠 신청 방법'이라 적힌 안내문이 놓여 있었다. 한 테이블 당 한 사람만 입장 가능하고 최대 3곡까지 신청이 가능하단 내용이었다.
이곳에 앉아있는 팬들은 소주에 특이한 라벨을 붙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고수포차에 방문한 이들은 '좋은데이' '처음처럼' 소주에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의 이름을 차용한 라벨을 만들어 붙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승관처럼' '원우데이' 같은 라벨을 제작하는 것이다.

지난 15일 서울 서교동의 '고수포차'의 모습. 2025.8.15/뉴스1 © News1 신윤하 기자
고수포차 사장인 고수경 씨(49·여)는 "이곳에 오는 손님들은 아이돌 포토카드, 인형을 가져와 사진을 찍거나, 소주 병에 좋아하는 아이돌 이름을 라벨로 붙이곤 하신다"며 "제가 특별히 뭘 해서 팬분들이 오는 건 아니고, 팬들이 '오늘은 애들 생일이니까 라벨도 붙이고 뮤비 보자' 하면서 찾아주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 씨는 "색안경을 끼고 아이돌 팬들을 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젊은 여성들이 잘생긴 남자 아이돌 보면서 좋아하는 게 뭐가 문제냐"며 웃어 보였다. 고 씨는 "덕질을 안 하는 손님들도 어쩌다 가게에 오실 때가 있는데 '우연치 않게 재미있게 놀고 간다'고 하시곤 한다. 그럴 때 K팝의 위대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전문가는 한때 '빠순이'란 멸칭으로 불리며 비하 당하던 K팝 팬들의 소비문화가 진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단순히 콘서트에 가서 아이돌을 응원하는 게 아니라 같은 취향을 소비하는 거다. 한마디로 '취향 소비'다"라며 "자신의 취향을 다양한 방식으로 고민해서 즐기는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좋은 문화라고 본다"고 말했다.
sinjenny97@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