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점 오류 세무사시험 뒤늦게 합격했지만…손해배상은 '안돼'

사회

이데일리,

2025년 11월 23일, 오전 09:00

[이데일리 성주원 기자] 세무사 시험 채점 과정에서 일부 미흡한 점이 있었다 하더라도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될 만큼 객관적 정당성을 잃은 위법한 행위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을 통해 국가시험에서 출제나 채점 과정에 문제가 있더라도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되려면 단순한 절차 위반을 넘어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할 정도의 위법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특히 시험의 공익적 성격과 신속한 사후 구제조치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법리를 제시했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사진=방인권 기자)
대법원 3부(주심 오석준 대법관)는 원고 18명이 한국산업인력공단과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피고가 원고들에게 각 37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23일 밝혔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은 2021년 9월 제58회 세무사 자격시험 2차 시험을 시행했다. 응시자 4597명 중 706명이 합격했고, 원고들은 세법학 과목에서 과락(40점 미만)을 받아 불합격했다.

시험 직후 공정성 문제가 제기되자 고용노동부와 감사원이 감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세법학 1부 문제의 경우 채점위원이 동일한 답안 내용에 대해 다른 점수를 부여하는 등 채점 일관성이 미흡한 것으로 확인됐다. 세법학 2부 문제는 채점위원이 채점기준검토회의를 거치지 않고 채점기준을 단독으로 변경했고, 실제 채점 시에는 변경한 기준과도 다른 기준을 적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공단은 2022년 8월 해당 문제들을 재채점해 기존 합격자 706명에 더해 원고들을 포함한 75명을 추가 합격시켰다. 원고들은 2022년 11월부터 2023년 5월까지 수습세무사 실무교육을 마쳤다.

원고들은 한국산업인력공단의 재량권 일탈·남용으로 인해 손해를 입었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1심은 원고 패소 판결했다. 1심 재판부는 공단의 업무처리가 미흡한 부분이 있었지만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될 만큼 객관적 정당성을 잃은 위법한 행위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2심은 1심 판결을 뒤집고 원고 18명에게 각 3700만원(재산상 손해 3500만원, 위자료 2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2심 재판부는 공단이 문제 채점 과정에서 요구되는 주의의무를 다하지 않아 시험 공정성을 침해하는 재량권 일탈·남용이 있었다고 봤다.

2심 재판부는 동일한 답안에 대해 다른 점수를 부여하거나, 채점기준을 임의로 변경하는 등 일관성 없는 채점이 이뤄진 점을 지적했다. 또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채점기준 적용의 일관성을 확인해야 할 주의의무를 현저히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2심 판단이 잘못됐다고 봤다. 대법원은 시험 출제나 채점 오류로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하려면 여러 사정을 종합해 판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해당 시험이 특정 자격을 부여하는 사회적 제도로서 공익성을 가지는지, 시험위원이 객관적 주의의무를 소홀히 했는지, 사후 구제조치가 적절히 이뤄졌는지 등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우선 “세무사시험이 개인적 이익뿐 아니라 사회적·공익적 법익도 포함하는 자격 검정 제도”라는 점을 고려했다. 또 “원고들의 답안에 최초 채점 당시에도 점수가 당연히 부여됐어야 하는지 1·2심에서 심리된 바 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대법원은 “원고들의 답안 내용 및 채점기준이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재채점 결과가 최초 채점 결과와 다르다는 사정만으로 최초 채점이 객관적 정당성을 잃어 위법하다고 볼 것은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채점위원이 채점기준을 수정할 때 채점기준검토회의를 거치도록 한 지침이 준수되지 않았더라도, 이는 공단의 내부지침에 불과해 곧바로 손해배상책임이 인정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공단이 응시자들의 문제 제기 후 신속히 감사를 진행하고 재채점을 실시해 원고들을 추가 합격시킨 점도 고려 대상이 됐다. 대법원은 “공단으로서는 비교적 신속하게 구제조치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에 대법원은 “피고 공단의 이 사건 처분이 객관적 정당성을 잃어 위법하다고 하면서 피고들의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한 원심의 판단에는 국가배상책임의 성립 요건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고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음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파기환송 이유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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