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보성의 윤제원 입구에 설치된 대한민국 100대 명품숲 입간판. (사진=윤제원 제공)
특히 보성군 겸백면 수남리 일원에 자리 잡은 숲정원 ‘윤제림’(允濟林)은 국내 최대 규모의 사유림으로 그간 1차 산업에 머물렀던 산림업을 6차 산업으로 만든 대한민국 임업과 산림의 역사이자 전설이다.
윤제림은 주월산(557m)과 초암산(576m)이 품은 숲으로 337㏊(100여만평) 규모에 50여년간 키운 편백나무를 비롯해 사계절 즐길 수 있는 꽃과 구상나무, 주목 등 멸종위기식물이나 희귀종으로 가득 채운 정원을 중심으로 다양한 체험과 휴식기능을 접목한 복합산림휴양단지이다.
전남 보성의 윤제원 내 정원인 성림원에 만개한 수국. (사진=윤제원 제공)
자신은 물론 대를 이어 나무를 심고 가꾸며 전 국민에게 숲이 주는 공익적 가치를 나눠준 인사들이 적지 않다. 산림청은 2019년부터 대한민국 산림명문가문 제도를 시행해 그들의 뜻을 기리고 있다.
제1회 대한민국 산림명문가문에는 모두 3개 가문이 선정됐다. 보성 윤제림도 제1회 대한민국 산림명문가문에 이름을 올렸다.
윤제림은 고(故) 윤제 정상환 선생이 가꾼 숲이다. 고 정 선생은 모범독림가로 한국전쟁이 끝난 뒤 황폐해진 국토를 보며 가슴 아파했다고 한다. 그는 어린시절 아름드리나무 사이를 맴돌며 숨바꼭질하던 추억을 떠올리며 푸른 나무가 우거진 숲을 다시 만들고자 했다.
1964년에는 당시 운영하던 양조장과 극장 등으로 모은 돈 120만원으로 전남 보성의 초암산과 주월산 일대 임야 275㏊(74여만평)를 사들였다. 당시 120만원은 서울 서대문극장까지 살 수 있었던 큰 돈이었다고 한다.
정 선생은 1969년부터 해송과 편백 등 6만본의 나무를 심었지만 관련 경험이 전혀 없던 그에게 조림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시련은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1971년 자비 200만원이라는 거금을 또 다시 투자해 3㎞의 농로를 어렵게 개설하고 조림 10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정 선생은 “나무는 가꿔야만 자란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았다. 산에 염소와 젖소를 키우고 거기서 나오는 분뇨와 퇴비를 밤나무에 시비하고, 밤 수확을 통해 얻어진 수익은 소나무 등 다른 나무 관리에 재투자했다.
1981년 1차 조림 10개년 계획이 끝나자 10년간의 경험을 토대로 임도 설치와 간벌, 밤나무를 대체할 조림 등 새로운 조림 10개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1980년대 남해안 일대에 만연한 솔껍질깍지벌레는 정성스레 키운 나무들을 모두 고사시켰다. 이 과정에서 정 선생은 이 산림병해충으로 소나무는 죽지만 참나무는 멀쩡한 것을 보고 고사한 소나무 대신 12㏊ 규모에 상수리나무를 심었다. 그 결과 국내 최초의 대면적 상수리나무 인공조림지를 만들었다.
밤나무가 유실수로서의 기능을 다하자 수종 갱신에 나섰다. 굴참나무를 중심으로 편백과 삼나무, 목백합, 육송, 고로쇠나무, 구상나무, 전나무 등 3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전남 보성의 윤제원 내 민간정원인 성림원 전경. (사진=윤제원 제공)
고 정 선생의 유지는 아들 정은조 숲정원 윤제림 회장에게 이어졌다. 선친인 정 선생이 보성에서 조림에 집중할 때 정 회장은 1976년 서울대를 졸업한 뒤 대기업 해외 주재원으로 승승장구했다. 이후 창업한 무역업이 성공하면서 제법 큰돈을 벌었다.
사업도 잘 되고, 도시 생활에 익숙했던 정 회장은 고향에 돌아올 생각이 없었지만 선친이 “산림녹화는 당대에 빛을 볼 수 없고, 자식 대에도 빛을 보지 못할 수 있지만 후대에 자랑할 훌륭한 산림모델을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며 간곡하게 부탁했고 정 회장은 이 부탁을 뿌리치지 못해 사업을 청산하고 보성으로 귀향했다.
본격적인 산림 경영자로 나선 그는 추가로 산을 매입해 337㏊ 규모의 산림을 추가 확보했고 아버지의 호를 따서 ‘윤제림’이라 명명했다.
정부는 2대에 걸쳐 조림한 공을 인정해 2012년 정 회장에게 동탑산업훈장을 수여했다.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받으면서도 산림경영에 대한 철학은 달랐다.
정 회장은 “단순히 나무를 팔아 돈 버는 시대는 지났다. 경제성도 없다. 산에서 생산하고, 만들고, 체험하고, 판매하는 1~3차 산업에 휴양과 레포츠까지 더해진 산림경영이 필요하며 6차 산업화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윤제림만의 모델을 만들었다.
넓은 임도가 생기고, 숙소와 체험장이 들어서고, 넓은 잔디밭이 조성되고 사방댐이 설치되는 등 과감한 투자를 이어갔다.
산림의 미래를 내다본 정은조 회장은 정원산업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정 회장은 평생의 미안함을 담아 정원의 이름을 부인 이름인 ‘성림원(聖林園)’이라고 지었다. 전남의 제12호 민간정원으로 탄생한 성림원은 전국 최고 수준의 수국(水菊)을 볼 수 있다.
수국은 이름이 말해주듯 물을 좋아하는 여름꽃이다. 윤제림 안의 성림원에는 4만그루의 수국이 편백숲과 어우러져 매년 방문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을 만큼 수국 명소로 유명하다.
성림원을 지나 주월산 정상에 오르면 패러글라이딩 체험이 가능하다. 또 윤제림 방문객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임산물 따기 체험, 숲 해설, 숲 인문학 강의 등은 숲을 느끼고 숲을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들로 구성돼 있다.
여기에 숲속야영장(27개소), 숲속의 집(12동), 아치하우스(18동), 단독숙박시설(6동) 등은 호남을 대표하는 산림휴양 시설이다.
특히 12㏊에 이르는 참나무숲은 국가에서 ‘채종원’으로 지정, 15년간 우량종자를 전국으로 보급하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장흥·보성지역의 표고 재배농가들이 표고버섯 주산단지로 지정받아 고소득을 올릴 수 있었던 것도 이곳에서 자란 참나무의 공급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은조 윤제원 회장이 선친이 식재한 나무를 봐라보고 있다. (사진=박진환 기자)
정 회장은 자신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임업의 6차 산업화를 홍보하고 있다. 한국산림경영인협회장과 한국임업단체총연합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대통령 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산림위원장도 맡고 있다.
정 회장은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2005년께 고향에 내려와 산림경영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며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산림 복합 경영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선친은 헐벗은 산을 녹화시켜야 한다는 신념 또는 사명감으로 일관하셨지만 당시 젊은 내가 보기에는 경영적으로는 다른 방안을 연구해야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임산물이나 목재 판매보다는 산림 휴양이나 복지 등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마지막으로 한 게 정원을 만드는 것”이라며 “연간 15여만명이 정원을 찾다보니 안정적인 수입원이 생겼고, 산림 휴양과 복지 등을 접목하면서 성공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정원 산업에 대해 정 회장은 “민간정원의 사업화를 위해 전 세계 정원들을 두루 살펴봤다”며 “일본 홋카이도에서 좋은 모델을 찾을 수 있었고 윤제림 내 성림원을 만들 수 있었다”고 전했다.
산림경영으로 성공한 경영인이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적지 않다. 정 회장은 “산업 특성상 인력이 많이 필요하지만 인건비도 많이 올랐고, 인력 구하기도 점점 어려워진다”며 “임업후계자들은 규모에 맞게 시작하면서 무리를 해서는 안되다”고 조언했다.
전남 보성의 주월산 정상에서 봐라본 보성읍 전경. (사진=박진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