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4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 모인 시민들이 출입을 막고 있는 경찰 병력에게 국회 개방을 촉구하고 있다.2024.12.4/뉴스1 © News1 박지혜 기자
2024년 12월 3일, 대한민국은 45년 만의 비상계엄 선포를 경험했다. 헌정사상 1938년 제주 4·3 때 이승만 정권의 첫 계엄 선포 이후 13번째, 민주화 이후 첫 계엄령이었다.
평범하게 일상을 보내던 시민들의 삶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계엄은 6시간 만에 해제됐지만, 계엄의 여파는 그 이후로도 몇 달간 계속됐다. 직업과 나이, 성별이 다른 모두가 동시에 겪은 집단적 트라우마가 됐다.
뉴스1은 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당시를 기억하는 각 연령대의 시민들을 만났다. 모두가 다른 곳에 있었고 경험은 다르지만, 계엄 이후 삶이 바뀐 건 같다고 입을 모았다. 누군가는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그 순간을 여전히 기억하고, 누군가는 계엄 해제 후에도 몇 달 동안 생계가 흔들렸다.
지난 2월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일대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 10차 범시민대행진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은박담요를 두른 채 윤 대통령의 파면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5.2.8/뉴스1 © News1 오대일 기자
새벽 2시 '남태령 대첩' 향했다…20대 구지혜 씨(26·여)
2024년 12월 3일 오후 10시 25분, 구지혜 씨는 잠에 들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여느 때처럼 자기 전 엑스(X·옛 트위터)를 들여다보는 데, '계엄이라고?'라는 내용의 트윗들이 우수수 올라왔다. 1인 가구인 데다가, 집에 TV가 없어서 뉴스를 볼 순 없었지만 실시간으로 SNS 등에 올라오는 혼란의 속보들이 현실을 알려줬다.
현대사로 배우던 계엄이 나에게도 현실로 다가왔구나. 왜 대통령은 계엄을 선포했는가? 그만큼의 국가적 위기가 있었나? 위기인 건 내 인생이지, 국가 체계가 아니었는데. 의문 투성이의 밤이었다.
이후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매주 탄핵 찬성 집회에 나가진 못했다. 대신 1년 중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짓날 열린 이른바'남태령 대첩'(탄핵 촉구 집회 참가자들이 경찰에 가로막힌 상경한 농민들을 도와 남태령을 함께 넘은 것을 비유)엔 참석했다. 새벽 2시에 추위로 사람들이 많이 빠지는 것 같아서 급하게 택시를 타고 남태령으로 향했다. '탄핵 찬성'에 1명이라도 보태려는 마음이었다.
집회 사회자도 1년 중 밤이 제일 긴 동지를 넘겼다고 고맙다는 말을 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장에 못 온 사람들이 배달로 시켜준 음식을 시위 참석자들과 함께 나눠먹었다. 준비했다는 듯 꺼내든 응원봉과 돗자리, 담요까지.
계엄 저지 및 탄핵을 위한 집회를 5~6개월 간 지속하면서 사회운동에 대해 알아가고자 하는 시민들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 같다. 다만 지금은 시작일 뿐이다. 계엄은 '퇴보'였기 때문에, 다행히도 지금은 0으로 돌아온 것과 다름없다. 계엄을 겪은 우리 사회가 한 발짝 더 나아갔으면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를 발표하자 광주 서구 한 상가에서 방송을 지켜보는 시민들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다. 2024.11.7/뉴스1 © News1 김태성 기자
송년회 중 울린 휴대전화 "X 됨. 계엄령 터짐"…사회초년생 양 모 씨(32·남)
한창 송년회를 할 12월, 거리는 늦은 시간에도 반짝였다. 사회초년생 양 씨도 지난해 12월 3일 소모임의 모임원 7명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다 울린 카카오톡 메시지가 양 씨의 시선을 뺏었다. "X 됨. 계엄령 터짐"
계엄이라니, 술기운이 얼큰한 상태에도 큰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생명이 위험해지는 거 아닌가? 가족들은 괜찮나? 함께 술을 마시던 모임원들에게 비상계엄 선포 소식을 알렸더니 처음엔 다들 부정했다. "가짜뉴스겠지"라고 무시했지만, 이윽고 모두의 표정은 굳어졌다.
급하게 저녁 자리를 파하고 나왔다. 70대 할아버지가 도로변에서 걸어오면서 "국회로 가자. 함께 윤석열을 끌어내려야 한다"고 외쳤다. 비현실의 광경이었다.
온갖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역사 교과서에서 봤던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여차하면 총을 구해서 싸워야 할지도 모르겠구나'하는 생각 등이 파바박 떠올랐다. 일상의 평범함이 깨지고 생명의 위기감을 느끼기까지, 단 몇 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일을 이틀 앞둔 지난 4월 2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인근 식당가가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25.4.2/뉴스1 © News1 김도우 기자
지옥은 계엄 다음날부터…헌법재판소 인근 상인 김 모 씨(42·남)
10년 넘게 헌법재판소 인근 안국역 일대에서 기념품점을 운영해 온 김 씨는 지난해 12월 3일 잠에 들 때쯤 계엄 선포 소식을 들었다. 뉴스를 보던 아내는 "탱크가 지나갔대"라고 했다. "계엄을 했다고?" 김 씨는 놀라긴 했지만 큰 동요는 안 하려 했다.
탱크는 가짜뉴스였고 계엄도 6시간 만에 끝났지만, 계엄의 충격은 다음 날부터 김 씨를 강타했다. 흉흉한 분위기 속에 길거리에 사람이 돌아다니지 않았다. 김 씨는 계엄 다음날인 12월 4일 매출액이 얼마였는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단 8만원이었다.
안국역에 한두 명 모이던 시위대는 탄핵 직전이던 3월 급증했다. 관광객은 없고 시위대만 넘쳤다. 헌법재판소 인근은 탄핵 선고를 앞두고 경찰 버스 차벽으로 둘러싸였고, 그야말로 '진공 상태'가 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때보다 탄핵 반대 시위대가 많고 강력했다.
시위대가 지나가면서 "파이팅하세요"라고 할 땐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평년엔 성수기에 해당하는 봄에도 혹한기를 맞이한 매출은 김 씨의 일상을 강타했다. 비단 3월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3~4개월간 이어진 매출 부진, 몇천만 원의 마이너스가 생겼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를 하루 앞둔 지난 4월 3일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주위로 경찰버스가 겹겹이 세워져 있다. 2025.4.3/뉴스1 © News1 박정호 기자
확성기 소리에 병원 다닐 정도의 충격…헌재 인근 자영업자 이 모 씨(55·여)
4년간 헌법재판소 인근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이 씨는 계엄 이후 트라우마가 생겼다. 급락하는 매출은 말할 것도 없고, 탄핵 반대 시위대의 확성기 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렸다. 병원에 다녀야 할 정도의 정신적인 충격을 느꼈다.
"윤석열 대통령을 석방하라" 외치던 탄핵 찬성파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다. 과도한 시위에 시달리면서 '차라리 시위를 제한했으면' 생각했다. 하지만 누가 그들을 제어할 수 있으랴. 대통령도, 국가도 흔들리는 판국이었다.
'지금은 회복됐냐'는 질문에 김 씨는 "회복이라기보단 그냥 일상을 찾았다"고 답했다. 확성기 소리가 들리지 않는 자신의 가게에서 장사하는 온전한 삶, 그냥 그런 보통의 삶을 되찾았단 것에 의의를 둔다.
4일 오후 서울역 대합실에서 시민들이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해제 관련 뉴스를 시청하고 있다. 2024.12.4/뉴스1 © News1 박지혜 기자
45년 만에 다시 겪은 계엄, 믿기지 않았다…박홍기 성균관대 특임교수(62·남)
박홍기 교수는 12월 3일 오후 10시 25분, 집에서 책을 읽던 중이었다. "계엄을 선포했대요" 아들의 말에 읽던 책을 덮어두고 거실로 급하게 나가보니 정말 계엄이 선포된 상태였다. 45년 만에 또 경험한 계엄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TV를 틀었더니 헬기가 움직이는 장면이 뉴스에 나왔다. 사람들이 국회로 모여들고 있었다. '계엄에 대한 저항이 역시 이렇게 표출되는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을 졸이다가 오전 1시 넘어 계엄이 해제되는 걸 보고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이날이 박 교수가 겪은 첫 번째 계엄은 아니었다.
박 교수는 "80년대에 마주했던 계엄은 쿠데타로 일어난 것이라 사람들이 완전한 무방비 상태였다"고 회상했다. 게다가 그땐 민주화가 완성되지 않은 시기였다. 그로부터 45년 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의식이 성숙한 상태에서 계엄을 겪었다. 성숙한 의식을 가진 국민들 덕분에 탄핵까지 이룰 수 있었구나, 박 교수는 생각했다.
그는 요즘 뉴스를 보면서 '어떻게 계엄 선포 전후로 저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나' 놀란다. 하지만 이런 진실들이 드러남으로써 우리 국민 모두 분명하게 각성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우리가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정치에 참여하지 않으면, 결국 사회가 퇴보한다는 걸 깨우쳤다. 박 교수는 "한국이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가장 큰 변화를 겪었다"고 덧붙였다.
sinjenny97@news1.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