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사료 과징금 9억여원 취소 확정…"대리점에 우월 지위 없다"

사회

이데일리,

2025년 12월 07일, 오전 10:30

[이데일리 성주원 송승현 기자] 하림(136480)그룹 계열사 제일사료가 대리점에 연체이자를 전가한 행위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가 부과한 과징금 9억6700만원이 대법원에서 최종 취소됐다.

7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서경환 대법관)는 지난 8월 14일 제일사료가 공정위를 상대로 낸 시정명령 및 과징금 납부명령 취소소송 상고심에서 공정위의 상고를 기각했다. 공정위의 처분을 모두 취소한 원심 판결을 그대로 확정한 것이다.

사진=제일사료
공정위는 2023년 5월 제일사료의 연체이자 전가 행위가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과 대리점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제일사료가 2009년부터 2021년까지 130개 대리점이 관리하는 직거래처의 사료대금 연체이자 약 30억원을 대리점 수수료에서 차감했다는 이유였다. 공정위는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9억6700만원을 부과했다.

하지만 서울고등법원은 지난 4월 “제일사료가 대리점들에 대해 거래상 지위를 가진다고 보기 어렵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대리점들은 언제라도 큰 비용 소모나 거래상 제약 없이 거래처를 전환해 대체거래선을 찾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배합사료 시장의 특성을 주목했다. 국내 배합사료 시장에서는 60여개가 넘는 업체가 경쟁을 벌이고 있다. 배합사료 제품은 차별성이 크지 않아 가격 경쟁이 주로 이뤄진다. 제일사료의 시장점유율은 2020년 기준 7.41%로 업계 5위 수준이다.

재판부는 대리점들의 영향력도 고려했다. 대리점들은 각 지역에서 오랜 기간 영업하면서 직거래처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직거래처의 배합사료 선택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다.

실제 시장에서 대리점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판결문에 따르면 A대리점은 제일사료의 대리점 지위를 유지하면서 경쟁사인 B의 대리점 영업을 시작했다. A대리점이 제일사료의 직거래처 상당수를 B의 거래처로 전환시키자 제일사료의 해당 직거래처 판매량은 2019년 3만2470톤에서 2020년 1만6855톤으로 급감했다.

재판부는 “원고가 사업능력이 큰 공급업자에 해당한다는 사정만으로 대리점들에 대해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설령 제일사료가 더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보더라도, 그 사업능력의 격차가 대리점들을 착취할 수 있을 정도에 이르렀다거나 대리점들이 제일사료에 사실상 종속되어 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공정위의 조사 방식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공정위는 이 사건 처분을 하면서 130개 대리점 중 신고인 1곳 외에는 다른 대리점을 일체 조사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거래상 지위는 거래상대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며 “공정위가 신고인의 주장과 일반적인 공급업자·대리점 관계만을 근거로 전체 대리점에 대해 거래상 우월적 지위가 있다고 단정한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사진= 방인권 기자)
검찰의 불기소 결정도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공정위는 이 사건 연체이자 전가 행위에 대해 제일사료를 공정거래법 위반 및 대리점법 위반죄로 고발했다. 하지만 검찰은 2019년 1월부터 2021년 12월까지의 행위에 대해 ‘혐의없음(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 결정했다.

검찰은 “다수의 사료업체가 경쟁하고 있고, 사료제품 간 차별성이 크지 않아 직거래처의 영향력과 지위가 상승했다”고 판단했다. “이에 수반하여 대리점의 역할 및 영향력이 커지면서 제일사료는 대리점에 의존하여 운영된다”는 것이다. 검찰은 “제일사료 대리점 운영자 대부분이 제일사료에 비해 자신들이 우월적 지위에 있다고 진술했다”며 “제일사료가 대리점들보다 거래상 우월적 지위에 있다거나 그 지위를 부당하게 이용했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연체이자 전가가 일방적이지 않았다는 점도 고려했다. 제일사료는 직거래처가 사료대금을 선납할 경우 대리점에게 선납수수료를 지급했다. 2009년부터 2021년까지 130개 대리점 중 93개 대리점에게 선납수수료 10억7568만원을 지급했다. 일부 대리점의 경우 연체이자 부담액보다 선납수수료를 더 많이 받았다.

공정위는 이 판결에 불복해 지난 5월 대법원에 상고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대리점 관계에 있는 사업자 간의 거래상 지위에 대해 한 번 더 판단을 받아볼 필요가 있어 상고를 제기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법원이 공정위의 상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원고 승소한 원심 판결이 그대로 확정됐다.

원고 제일사료를 대리한 법무법인 태평양 공정거래그룹 권도형 변호사는 “예전에는 공급업자와 대리점 사이에 규모 차이가 있으면 기계적으로 거래상 지위가 인정됐었다”며 “이번 판결은 거래상 지위도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따져봐야 한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권 변호사는 “규모가 크다고 해서 그것만 가지고 거래상 지위로 볼 수 없다”며 “앞으로는 단순히 규모 차이나 거래 의존도만 가지고 보지 않고 여러 가지 사정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번 판결은 거래상 지위 남용 행위에 대한 판단 기준을 제시한 선례로 평가된다. 대리점법은 공급업자가 대리점에 대해 거래상 우월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인정되지 않는 경우 적용을 제외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공정위의 향후 법 집행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권도형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사진=이데일리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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