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작가로 변신한 전 검찰총장 “행복한 성공 비법은”

사회

이데일리,

2025년 12월 30일, 오전 05:01

우리 사회에 따뜻함을 전해온 예종석 한양대 명예교수가 대한민국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명사들과의 릴레이 인터뷰를 진행합니다. 그들의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을 공유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깊이 있는 통찰과 영감을 제공하겠습니다. <편집자 주>

도예가로 변신한 김준규 전 검찰총장이 아틀리에로 변신한 자신의 서울 용산구 이촌동 자택으로 기자들을 초대했다. 지난 전시회 이후 만든 자소상 ‘흙작가’를 바라보며 흙작가의 길을 걷게 된 이야기를 시작했다.(사진= 이영훈 기자)
[대담=예종석 명예대기자(한양대 명예교수)·정리=이지현 기자] “커피도 있고 차도 있습니다. 어떤 것으로 드실래요?”

흙 작가(도예가)로 변신한 김준규 전 검찰총장은 아틀리에로 변신한 서울 용산구 이촌동 자택을 찾은 기자에게 이같이 말했다. 아메리카노를 선택한 기자에게 김 전 총장은 “그건 내가 재주를 부릴 수 없는데”라며 아쉬워했다. 하지만 아메리카노 한잔도 그림을 그리듯 내줬다. 거실 한쪽 편에는 다양한 차들과 아기자기한 에스프레소 잔으로 가득했다. 그는 “전국에 있는 각종 차도 모으고 해외출장을 다니면서는 에스프레소 잔을 모으는 게 취미였다”고 말했다.

소탈한 모습에 아기자기한 취미를 가진 그는 사실 법조인 경력만 40여년에 이르는 법조계 원로다. 대학교 3학년 때인 1979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법무부 법무실장, 부산고검 검사장, 검찰총장 등 검찰 요직을 거쳤다. 총장 취임 직후 흐트러진 검찰 조직을 추스르고 국민 신뢰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수사의 책임성과 정당성 확보를 위해 조직쇄신도 시도했다.

김 전 총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은 나를 처음부터 지명할 생각이 없었다”며 “첫 후보가 낙마하며 차선으로 지명돼 당시 기자들에게 ‘난 빚진 게 아무것도 없다’고 얘기했다. 그래서 정치와 거리 두고 검찰 역할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법복 대신 흙이 묻은 작업복이 편하다고 했다. 도예가라는 두번째 인생의 희로애락을 손끝으로 표현하는 일이 능숙해졌다. 인생에 후회가 없느냐는 물음에 그는 “후회라는 건 매 순간의 문제가 아니다”며 “인생 전반을 돌이켜봤을 때 후회는 없다. 하지만 검사 같은 직업은 다시는 안 할 거다. 힘들었다”라고 털어놨다. 의외 답변에 그의 이야기가 점점 더 궁금해졌다.

김준규 전 검찰총장이 고교 수학여행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사진=이영훈 기자)
-법조계 경력만 40년이다. 돌연 도예가로 변신한 이유는

△변신은 아니다. 새로운 삶이란 걸 생각했다. 65세가 될 때가 대부분 정년이다. 나는 64세 겨울에 ‘이대로 살아가는 게 맞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변호사로 일하다 죽는 게 내 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검찰총장 출신 변호사’라는 타이틀이 결국 과거 영광의 찌꺼기를 먹고 사는 것 아닌가. 마라톤에서 우승(총장까지 마친 것)까지 하고서도 트랙을 계속 도는 내 모습이 너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화려한 삶보다도 이제부터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지금 새로운 것을 시작하지 않고 기존에 하던 일만 계속하다 보면 쪼그라들고 늙어가면서 점점 후회만 될 것 같았다.

그때 읽던 책이 ‘리타이어먼트(Retirement)’다. 책에는 두 가지 조언이 나온다. 첫째는 진정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면 기존의 계획된 삶을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법무법인 화우 대표변호사로 편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그 구절을 보고 곧바로 그만뒀다. 당시 회사 사람들이 놀라서 “저희가 뭘 잘못했습니까”라고 물을 정도였다. 두 번째 조언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면 여가나 취미가 아니고 ‘직업’으로 시작하라는 말이었다.

-새로운 직업으로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인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지만 자격도 없고 나이도 많아 시작할 수 없었다. 작은 벤처기업을 해볼까도 했지만 그 책에서 ‘돈을 넣어서 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는 구절이 있어 하지 않았다. 문득 고등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조소반에 가입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지원자가 나를 포함해 3명뿐이었다. 고교에 막 입학해 새 교과서를 받았을 때 미술 교과서를 넘겨보다 권진규 작가의 소녀상 사진을 봤다. 그때 ‘나도 이런 것을 만들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제일 먼저 만든 작품도 소녀상이었다. 모델 없이 상상으로 만든 작품이다.

-미술에 어느 정도 소질이 있었나.

△조금 했다. 매년 홍익대 미대에서 고교생 미술경시대회를 개최했다. 미술 선생님을 따라 고2 선배들과 함께 대회에 참여했다. 하루 ‘땡땡이’를 칠 수 있어 신나서 갔는데 조소 분야에서 1등을 했다. 그때 ‘나에게 미술 소질이 있나 보다’ 하고 미술에 푹 빠졌다. 경기고를 다니며 대학에서 주는 상도 받으니 미대는 공짜로 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 이후부터 수업 시간에 조소실에 가서 작품을 만든다며 땡땡이도 많이 쳤다. 그렇게 1년을 보냈더니 1학년 말 성적표가 55등 중 47등이었다. 충격이었다. 공부를 잘했던 편이라 아무리 놀아도 20~30등은 할 줄 알았다. 부모님께 혼나지는 않았지만 충격을 받고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미대 진학의 꿈을 버리고 다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재수 끝에 서울대 사회계열로 진학했다. 하지만 은퇴를 앞두고 ‘내가 만약 미대를 갔으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라는 생각을 문득 하다가 취미생활로 하던 조소를 직업으로 삼았다.

-만약 고교 때 조소를 하면서 성적이 20~30등을 유지했다면.

△서울대 미대는 갈 수 있었을 거 같다. 그랬다면 법대가 아닌 다른 것을 했을 확률이 높다.(웃음)

-‘취미’가 아닌 ‘직업’으로 조소를 한다는 것의 차이가 있다면.

△직업으로서는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생계유지를 못 하고 있어서다. 책 ‘리타이어먼트’에서 낚시꾼과 어부의 예시가 나온다. 낚시꾼은 하고 싶을 때 나가고 하기 싫으면 그만둘 수 있지만 어부는 추워도 더워도 일을 나가야 한다. 낚시꾼은 큰 고기만 잡으려 하고 월척을 잡았다고 자랑하지만 어부는 작더라도 팔릴 만한 물고기를 잡아야 한다. 낚시꾼과 어부는 모두 물고기를 잡지만 접근하는 태도와 자세는 완전히 다르다. ‘직업’으로 한다는 것은 이처럼 딱 구분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작품에 임하는 자세나 결과물이 달라졌다.

-첫 개인전도 했다.

△경기미전에 작품 세 점을 출품하고 2년 만에 50점의 작품을 만들어 전시회를 성대하게 개최했다. 매일 100명여명씩 찾아올 정도였다. 작품의 70%는 나와 가족,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웠다. 성경 속 인물도 있고 십자가도 있다. 문제는 판매였다. 사람들이 사겠다고 해도 내가 좋아서 만든 작품은 못 팔겠더라. 한번은 교회 장로님이 흙 십자가를 사겠다고 했는데 두어 달 고민 끝에 죄송하지만 팔 수 없다고 했다. 돈을 받고 팔려니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십자가를 수집하는 장로님이 흙으로 빚은 십자가만 없어서 구매하려던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따로 만들어 드렸다. 사실 작품을 돈으로 매기긴 어렵다. 내 작품을 잘 보관해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팔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비싸게 살수록 잘 보관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에 가격을 매기기가 어렵다.

-정말 부지런하다. 한 작품에 1개월 넘게 걸릴 텐데.

△첫 전시회는 아주 편했다. 두 번째 전시회는 100점 정도 모아서 ‘고희’(古稀)전으로 열 예정이었다. 그런데 똑같은 걸 또 하면 안 될 것 같아 구상 중이다. 현재 고민하는 주제는 삶과 죽음, 구원이다.

-검사님이 너무 철학적인 거 아닌가.

△하하(웃음). 깊이 있게 작품에 들어가는 게 좋다. 사실 난 ‘예수 귀신 물러가라’고 하던 사람이었다. 서른살이 넘어 세례를 받고 장로가 됐다. 지금은 겟세마네의 기도를 작품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구레네 시몬을 작품화했다. 자투리 흙으로는 십자가를 즐겨 만든다.

-현재 만들고 있는 작품에 수학여행 때의 기대와 즐거움이 담겼다.

△어릴 때부터 가장 기뻤던 때를 작품으로 만들고 있다. 흙이 마르기 전에 속을 파내야 하는데 거의 굳어져 고민이다. 아직 제목을 정하지 못했다.

-그때가 가장 기뻤을 때인가.

△아니다. 손녀가 태어나서 퇴임식 때 생후 1개월 된 손녀를 안고 사진을 찍었을 때가 가장 기뻤다. 그 모습도 작품으로 담았다. 검사 때는 기쁜 일이 없었다.

-많은 재료 중 굳이 흙을 택한 이유는.

△모든 조소의 기본은 흙이다. 흙으로 만들고 브론즈나 석고, 알루미늄으로 형상화한다. 난 테라코타(점토를 구워 기와처럼 만든 건축용 도기)도 싫다. 난 흙을 고집한다. 흙의 재미는 불에 따라 흙의 종류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흉상을 만들면 작품을 쪼개서 안을 파내고 바싹 말려서 1200℃ 가마에서 굽는다. 파내는 과정과 굽는 과정에서 실패가 많다. 난 금이 가도 작품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흙은 장기보존이 어렵지 않나.

△비슷한 질문을 종종 받을 때마다 ‘빗살무늬 토기’ 얘기로 답을 한다. 조상은 흙에 물을 더해 반죽하고 모양을 만들었다. 여기에 불을 가하면 형태가 유지된다는 것도 알아 냈다. 흙을 구우면 쇠로 만드는 것보다 오래간다. 깨뜨리지 않는 한 영구보존도 가능하다.

김준규 작가는 대한민국 1호검사 이준 열사와 임시정부 2대 국무령을 지낸 홍진 선생의 흉상도 만들었다. 대검찰청에 전시해뒀던 두 흉상은 현재 김 작가의 아뜰리에로 옮겨둔 상태다.(사진=이영훈 기자)
-흙 전문 작가가 많나.

△없다. 요절한 고 권진규 작가 이후에 거의 없다. 흙으로 조소를 시작해도 흙으로만 먹고살 수 없다 보니 알루미늄, 브론즈 형태로 다 바꾼다. 그래서 흙을 고집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앞으로 흙으로 100점을 만들고 나면 나한테 테라코타로 도전할 사람은 없을 것같다.(웃음)

-선친께서도 예술가셨다.

△부친이 음대 교수이자 피아니스트였던 김형근(1918~1982) 교수다. 경성에서 풍금을 제일 잘 치셨다. 당시 일본은 음악을 제일 잘 하는 사람을 뽑아 도쿄대 음대로 유학을 보냈는데 그때 아버지도 선발돼 일본에 유학을 가셨다. 그렇다고 친일파는 아니다. 이후 귀국해 경성사대와 평양사범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미 군정 때부터 해방 후까지 음악편수관(문교부 편수관)을 하셨다. 1949년에는 첫 중학교 음악 교과서인 ‘중등음악통론’을 펴냈다. 여기에 높은음자리, 낮은음자리, 버금딸림화음 등과 같은 우리말 음악용어를 만들어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많이 알려지지 않아 조금 아쉽다.

-예술가의 ‘끼’를 가지고 법대에 진학했다.

△미대와 법대 진학을 두고 고민은 처음엔 없었다. 그냥 공부해서 서울대 사회계열에 갔고 학교 성적이 좋으니까 경제학과를 갈까, 법학과를 갈까 고민했다. 그때는 법대에 가서 독일 유학을 다녀오고 나중에 서울대 법대 교수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유학의 꿈을 접었다. 2학년 말부터 사법시험 준비를 시작해 3학년 말에 합격했다. 운도 좋았고 막판엔 정말 열심히 했다. 공짜로 된 건 아니다.

-검사를 뽑기로 정했다는 얘기는 뭔가.

△사법연수원 때 결혼을 하고 군법무관 시절을 보냈다. 판사냐 검사냐를 두고 고민하는데 시보를 해보니 판사는 너무 답답했다. 그때 마침 국제검사 제도가 시작될 때여서 국제 변호사라는 선택지도 있었다. 사실 당시에 국제변호사로 갔으면 돈도 많이 벌었을 거다. 하지만 검사에 미련이 있었다. 그래서 자정을 넘겨 군 모자에 ‘검사’, ‘변호사’ 2개를 넣고 뽑았다. 그 결과 ‘검사’를 뽑았다. 운 좋게 총장까지 다 했으니, 참 운이 좋은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검사 재직 당시 인사에서 물을 먹기도 했다.

△통상 법무부 법무실장까지 하면 대개 어디든 검사장으로 간다. 나를 데려간 법무부 장관과 잘 통해 법무실장만 2년을 했다. 그런데 장관이 바뀌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한마디로 찍혔다. 결국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갔다. 대전지검장은 솔직히 말해서 고등검찰청 검사장으로 승진이 쉽지 않은 자리다. 인사가 있기 한 달 전인 2월에 국제검사협회(IAP) 집행위원으로 헬싱키 회의에 참석했을 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원래 일본 쪽 인사가 아시아 부회장이었는데 고령이라는 이유로 유럽 쪽 위원들이 반대했다. 그러면서 내가 갑작스럽게 그 자리에 앉게 됐다. 이런 건 보통 로비 없이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냥 운이 좋았다. 그래서 장관한테 전화했다. ‘제가 IAP 아시아 부회장이 됐다. 그런데 만약 고검장 승진이 안 되면 사표를 내야하고 그러면 부회장직도 날아간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결국 부산고검장으로 발령났다. 부산고검장은 대개 그다음에 대검찰청 차장이나 서울고검장으로 가는 자리다. 그런데 거기서 또 한 번 찍혀서 대전고검장으로 갔다. 부산 사람들이 저보다 더 황당해하며 송별연을 해주는데 뭐 변명할 수도 없고 그래서 그냥 ‘아직 진검승부가 남았다’고만 말했다. 그런데 정말로 대전고검장으로 갔다가 총장이 돼버렸다. (웃음) 그래서 지금도 부산 사람들을 만나면 그 말을 꼭 기억해 얘기한다. ‘그때 진검승부 남았다더니, 진짜 총장이 됐다’고.

-현재 진행 중인 형사사법개혁에 대한 견해가 궁금하다.

△형사사법제도는 단순한 행정제도가 아니라 사법제도다. 검사는 판사와 동일한 자격을 가진 사람으로 신분이 보장된 채 행정부 내에서 사법 기능을 수행하는 존재다. 형사사법제도의 지휘부(검찰청 폐지)를 없애겠다는 발상은 결국 사법통제 기능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그 결과 돈 있고 힘 있는 사람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억울하게 당하는 구조로 사회가 변질할 위험이 크다. 현재 국민 대다수가 형사사법제도의 붕괴가 어떤 의미인지 체감하지 못하는 점이 안타깝다. 국민 대부분은 과태료 한두 차례 내는 수준에 그친다. 형사절차 안으로 직접 들어갈 확률이 5%도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국민이 사법제도가 무너졌다는 것을 인식하기 어렵다. 검찰이 정치적 중립성을 못 지켜 개혁하겠다는 거라면 중립성을 지킬 수 있게 해줘야지 해체는 답이 아니지 않을까. 검찰이 가졌던 권한을 경찰에 주면 더 잘할 수 있을까.

-인생이 롤러코스터다. 앞으로도 흙을 고집할 건가.

△계속 재료는 ‘흙’이다. 고 권 작가의 뒤를 잇고 싶다. 게으른 편이긴 하지만 만들고 싶은 게 열 몇개나 된다. 오래 하면 막히고, 새롭게 시작해야 또 영감이 들어온다. 요즘은 아담과 하와, 카인과 아벨 같은 성경 이야기에도 관심이 많다. ‘범죄’를 다뤄왔으니 그런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작품에 녹아드는 거 같다.

-후진들에게 조언한다면.

△한국장학재단에서 1년 정도 멘토로 활동했다. 당시 학생들로부터 “앞으로 뭘 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다. 그래서 늘 이야기한 게 두 가지였다. 직업은 미래에서 찾아라. 그리고 재능에서 찾아라. 지금 좋아 보이는 직업이 30년 뒤에도 같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지금은 상상도 못 하는 새로운 직업이 생기지 않나. 결국 그때 세상에서 통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지금 눈앞의 유행 말고, 미래를 내다보고 진로를 결정하라”고 조언한다. 직업을 재능에서 찾으라는 건 재능과 맞는 직업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노래를 잘하면 노래 부르는 게 ‘노는 거’ 같지만 그걸로 돈을 벌 수 있다면 그건 바로 재능이 직업이 된 거다. 나도 검사로서의 성격은 잘 맞았다. 하지만 재능면에서 꼭 맞는 직업은 아니었다. 그래서 늘 이야기한다. “성격에 맞는 직업보다, 재능에 맞는 직업을 찾으라”고. 또 성공과 행복이 충돌할 땐 행복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성공하겠다고 가족도, 삶의 여유도 다 포기하면 결국 공허해진다. 행복한 성공을 해야 한다.

-새로운 삶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찾은 것 같다.

△젊은 시절엔 공부를 잘하니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고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검사로서의 의무를 다하며 사회적 기준에 맞는 성공을 향해 달렸다. 그 시기의 삶은 ‘졸렌’(Sollen), 즉 ‘해야 하는 삶’이었다. 그러나 퇴임 이후 흙을 만지고 인사동 막걸리집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누구의 기대도 아닌, 나 자신의 호기심과 재능이 이끄는 삶이다. 이것이 바로 ‘자인’(Sein)의 나, 즉 존재 그 자체로서의 삶이다. 이제 ‘의무의 나’가 아닌 ‘존재의 나’로서 살아가고 있다. 목표도 바뀌었다. 이전엔 권력이나 돈, 명예를 중시했다면 지금은 행복이 가장 소중하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에게도 늘 말한다. 성공보다 행복이 우선이라고. 앞으로도 난 끊임없는 호기심으로 배우고, 만들고 느끼며 살아가려고 한다. 이것이 나의 건강과 새로움을 찾게 하는 원천이다.

김준규 전 검찰총장이 자소상 ‘Memento Mori’(죽음을 생각하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작품은 불에 굽지 않았다. 물에 담그면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흙으로 만들어진 육신도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작품에 담은 것이다. 그는 자녀들에게 자신이 죽은 후 이 작품을 물에 담가 달라고 부탁했다.(사진=이영훈 기자)
김준규 전 검찰총장

△1955년 서울 △경기고 △서울대 법학과 △1979년 제21회 사법시험 합격 △1982년 제11기 연수원 수료 △청주지방검찰청 제천지청장 △법무부 법무실장 △대전지방검찰청 검사장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 △대전고등검찰청 검사장 △검찰총장(2009년 8월~2011년 7월) △국제검사협회(IAP) 명예회원 △법무법인 화우 대표변호사 △2019년 도예가(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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