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노란봉투법과 한국 제조업의 경쟁력

사회

이데일리,

2026년 1월 12일, 오전 10:50

[정만기 한국산업연합포럼 회장] 수송기계, 조선, 전자기기, 일반기계 등 한국 주력 제조업의 경쟁력은 오랫동안 ‘값싼 노동’이 아니라 모기업과 협력기업이 상호 협력하는 유연한 생산체제로 확보됐다. 모기업과 1차 혹은 2차 이하 협력업체 간 장기적 거래 관계, 기술지도와 공동개발, 품질·공정의 긴밀한 연계는 다품종·고품질·단납기 생산을 가능하게 한 핵심 요인이다. 이러한 협력 구조는 일본과 함께 한국 제조업이 단기간에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는 데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문제는 개정 노동조합법(노란봉투법)이 노사관계에 치중한 나머지 이러한 생산체제에 대한 고려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이 법은 원청과 하청 간의 장기적 협력관계를 기술지도나 공정 관리 경쟁력이라는 맥락보다는 ‘실질적·구체적 지배’의 관점으로만 보고 있다. 그 결과 생산체제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하면서 하청 노조가 원청 경영진을 상대로 이들 간 장기적 기술협력 관계를 악화하는 방향으로 교섭이나 압박을 시도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제도 변화는 노동권 보호라는 정책 목표와는 별도로 원청기업의 행태 변화를 유발할 수 있다. 법적 책임, 갈등과 분쟁 가능성이 커질수록 원청으로서는 협력업체에 대한 기술지도나 공동개발을 줄이고 거래 기간을 단축하며 복수 협력업체 간 경쟁입찰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대응하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 된다. 즉 한국 제조업의 강점이었던 장기적 협력 모델이 영미식 단기 계약 중심 구조로 전환될 유인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의 체계 조립업체들은 1차나 2차 협력업체들과 30년 이상의 장기적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제품 공동개발, 기술지도 등을 토대로 소위 ‘저스트 인 타임’(Just-in-time·적기 생산), 공동개발과 상생협력으로 기술혁신과 경쟁력 확보를 이뤄왔으며 해외 진출 시에도 원청과 하청이 공동 진출해 생태계 경쟁력을 확장해 왔다. 그러나 우리와 달리 영미 제조기업들은 상대적으로 일회성 단기 계약 관계에 주로 의존하고 단기 이익확보에 급급하면서 중장기적 경쟁력을 상실해 왔다.

우리의 영미식 단기 계약관계로의 전환은 산업생태계의 장기경쟁력을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 장기 거래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협력업체가 설비 고도화나 숙련 인력 양성과 같은 자산특정성 관련 특수 투자를 감행하기 어렵다. 이는 곧 품질 변동성 증가, 납기 불안정, 생산 전환 비용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다품종·소량·고빈도 전환이 일상화한 오늘날 제조 환경에서 신뢰 기반 협력이 위축될 경우 스마트 생산 혹은 유연 생산체제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학습과 기술 축적의 단절이다. 한국 제조업은 원청과 협력업체 간 반복적 협업을 통해 공정 개선과 기술 이전이 누적되는 구조를 형성해 왔다. 단기 계약 중심 구조는 단기 비용 절감에는 유리할 수 있으나 이러한 동태적 경쟁력과 쌍방 기술혁신을 약화시킬 위험이 크다. 결과적으로 개별 기업의 법적 리스크 회피가 산업생태계 전반의 경쟁력 저하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위장도급이나 노무 책임 회피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배와 협력은 구분해야 한다. 임금·채용·해고 등 인사·노무에 대한 원청의 직접적 개입과 품질 기준 설정이나 기술지도 같은 생산 협력을 동일 선상에서 판단할 경우 협력은 위축되고 생산체제는 경직될 수밖에 없다.

이분법적 사고가 아니라 산업 실정에 맞는 정교한 전략과 선택이 필요하다. 장기적 기술협력과 공동개발을 명확한 계약으로 규율하고 하청의 노무 관리에 개입하지 않은 원청에 대해서는 책임을 면제하는 ‘안전지대’를 제도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노동권 보호와 산업 경쟁력이라는 두 목표가 충돌하지 않는다.

노란봉투법은 노동시장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한국 제조업이 어떤 생산체제와 산업조직 모델을 유지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다. 협력을 지배로 오인하는 법은 협력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그 비용은 결국 산업 전체는 물론 근로자들도 부담하게 될 우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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