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서울시 강남구의 마지막 판자촌이라 불리는 구룡마을 화재 현장 너머로 신축 아파트가 우뚝 서 있다. 2026.01.23/© 뉴스1 권진영 기자
최 씨는 지난 16일 새벽만 생각하면 아직도 몸이 덜덜 떨린다고 했다. 화장실 불이 켜지지 않는다는 딸의 목소리에 눈을 뜨니 온 집안이 정전이었다. 잠시 후 밖에서 무언가가 '팡팡'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문밖엔 이미 벌건 화염이 열기를 뿜고 있었다.
모녀는 잠옷 바람에 양말조차 신지 못하고 다급히 집 밖으로 나섰지만 불길에 퇴로가 막혀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개천을 통해 파이프를 잡고 대피하기 시작했다. 난간과 덤불에 이미 손과 다리는 상처투성이가 됐다.
"피신하고 한 15분, 20분 사이에 (불길이) 집을 다 덮쳤다. 사이렌이나 불났다고 얘기해 주는 사람이 전혀 없어서 만약 우리가 늦게 일어났다면 아마 목숨까지 잃었을 것 같다"고 최 씨는 말했다.
사정은 다른 이재민들도 마찬가지다. 뉴스1의 인터뷰에 응한 대다수의 이재민은 화재 당일 사이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30년이 넘게 이 마을에서 살아온 양 모 씨(68세·여)는 소방의 진화 작업이 너무 소극적이었다며 "사이렌도 안 울리고 와서 주민들이 다 타 죽을 뻔했다"고 말했다.
당시 강남소방서가 구룡마을 화재 관련 신고를 접수한 것은 오전 5시. 5분 후 현장에 출동해 이내 대응 1단계를 발령했다. 4지구에서 시작된 불길은 잠시 잦아드는 듯 하더니 6지구와 인근 야산으로 번졌다.
소방은 오전 8시 49분쯤 대응 2단계를 발령하고 오전 11시 34분 초진에 성공했다. 불길이 모두 잡힌 것은 오후 1시 28분이었다. 소방당국은 지난 19일 합동감식을 마쳤으나 정확한 화재 원인 파악까지는 시일이 더 걸릴 전망이다.
강추위 버틸 패딩·갈아입을 속옷 부족
21일 서울시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입구 어귀에 화재 이재민을 위한 급식소가 차려져 있다. 이곳에서는 아침, 저녁 2끼를 제공하는데 재료값 등은 화재 피해를 입지 않은 나머지 주민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 대고 있다. 2026.01.23/© 뉴스1 권진영 기자
화재민 급식소 안쪽에 마련된 쪽방에 모인 이재민들은 이불 하나에 서너명이 다리를 끼워 넣고 물을 데워 마시며 추위를 버티고 있었다. 끼니는 아침·저녁으로 마을 회관 봉사자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제공하고 인근 교회가 점심을 대접한다.
한 끼에 9000원 상당의 식대 지원이 있지만 근처에 음식점이 적고 기본 가격대가 높아 추가금이 든다. 이재민 나이대가 대부분 60~70대로 높아 칼바람이 몰아치는 밖으로 나가기 어려운 부분도 있어 보였다.
이들 중 제 옷을 입은 사람은 드물었다. 난리통에 빠져나오느라 제대로 옷을 챙길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4지구에 살던 주민 A 씨는 "옷이 없어서 이렇게 얇은 거 주워 입고 돌아다닌다"며 두툼한 방한용 겉옷과 속옷, 로션 등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특히 자주 갈아입어야 하는 속옷과 양말 등의 수요가 높았다.
일부 이주민은 평소 먹던 약을 챙겨 나오지 못해 급히 재처방을 받아야 했다고 하소연했다. 그런가 하면 급식소 앞에서 손해보험사 직원과 상담하던 주민 B 씨는 "나는 어떡하면 좋냐. 살림이 많았는데…"라며 토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긴 세월 하나씩 마련해 온 세간살이가 하루 아침에 잿가루가 된 이재민들은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지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임시 숙소 운영은 26일까지…2차 거주 대책 시급
이재민들은 가까스로 목숨은 구했지만 앞날을 막막해 했다. 구청은 화재 직후 구룡중학교에 임시 대피소를 설치하고 호텔 2곳 총 100호실에 이재민 임시숙소를 마련했다. 전체 이재민 181명(129세대) 중 114명(85세대)이 호텔에 묵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주로 친척 집 등 기댈 곳이 없는 경우였다. 하지만 당장 오는 26일에는 호텔에서 짐을 빼야 한다. 최저 영하 8도까지 기온이 떨어질 것으로 예측되는 가운데 이재민들은 길바닥에 나앉을 위기에 처했다.
재개발을 앞두고 구룡마을 토지 소유권을 넘겨받은 서울주택도시개발공사(SH)는 지난 21일 강남구청에 이재민 임시 숙소 기간 연장을 위해 공문을 보냈다. 이튿날 SH와 서울시·강남구가 한 차례 논의를 거쳤으나 언제 결론이 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태다.
강남구청 관계자는 23일 뉴스1과의 통화에서 호텔 투숙 종료 후 2차 숙소 계획에 대해 "26일 이후로는 SH로 넘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원래 (숙소 지원 기간이) 7일인데, 강남구에서 3일 더 하기로 한 것"이라고 공을 넘겼다.
21일 서울시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화재 현장. 지난 16일 새벽에 난 불로 폐허가 됐다. 2026.01.23/© 뉴스1 권진영 기자
이재민들은 임대주택은 어디까지나 '임대'라는 것에 한계를 느낀다.
양 씨는 "지저분해도 (마음이) 편안한 집을 원한다"며 "크고 번듯하지 않더라도 내 집이 좋다"고 말했다. 임대주택 관리비를 부담하기엔 경제적 형편도 녹록지 않다고 했다.
구룡마을 주민들이 개발로 이익을 보려 한다는 악플에 대해서는 "사악한 사람들이었다면 이렇게 살지 않는다. 무슨 방법을 찾아서라도 나가서 내 집을 갖고 살았을 것"이라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최 씨는 "SH는 이곳을 개발하겠다고 특별 공급 대책을 세워 놨는데, 우리는 원치 않아서 이때까지 나가지 않고 살았던 것"이라면서 "우리는 화재민에 대한 이주 대책을 별도로 세워주길 원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오랜 세월, 내가 필요로 하는 걸 준비해서 불편함 없이 살고 있었는데 다 잃어버렸다. 지금 시급한 건 나가서 살 수 있는 (주거) 대책이다. 하루속히 발판 삼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편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 16일 화재 발생 직후 "진화 이후에도 이재민 임시주거, 의료지원, 생필품 지원 등 생활안정 대책도 즉시 가동하라"고 지시했다.
realkwon@news1.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