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영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아칸소 주지사인 '젊은 촌뜨기' 빌 클린턴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슬로건으로 현직 대통령 조지 부시를 꺾는다. 걸프전 승리로 재선을 향한 탄탄대로를 달리던 아버지 부시는 이 전설적 슬로건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릎을 꿇었다.
이 슬로건은 당시 미국 사회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가 경제라는 점을 정문일침(頂門一鍼)처럼 짚은 명구로 남았다. 빌 클린턴은 나중에 각종 추문으로 이미지를 망쳤지만, 당시에는 이렇게 핵심을 짚어내는 능력으로 자신이 미국 대통령이 될 자격이 있음을 인정받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의 리더가 짚어내야 할 핵심 문제가 있다면 무엇일까. 어려운 경제와 민생을 살리는 것도 중요하고, 한반도를 둘러싼 위태로운 지정학 조건에서 안보를 챙기는 것도 필요하다. 선진국 간의 첨단기술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아야 하는 건 당연하고, 특히 인공지능(AI) 경쟁은 우리가 반드시 이겨내야 할 과제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으니 그게 바로 '전력난'이다. 우리는 지금 전기가 없다면 유능한 정부도, 발전된 사회 시스템도, 첨단 과학기술도 모두 무용지물인 세상을 살고 있다. 전기가 곧 경제고, 안보고, 민생이고, 과학기술이다. AI 시대로의 전환이 빨라지면서 전기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인간을 대체한다는 범용인공지능(AGI)을 넘어서는 초인공지능(ASI)조차도 전기가 없으면 의미가 없다.
AI 패권 다지는 미국도 문제는 전력난
세계를 상대로 전례 없이 패권을 휘두르는 트럼프 대통령은 두려운 게 없는 듯하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있으니 그게 전력난이다. AI 경쟁에서 승리해 미국의 패권을 공고히 다지겠다고 천문학적 자금을 쏟아부어 한국과 타이완의 반도체 공장에서 생산되는 AI용 반도체들을 독점하지만, 전기가 부족하니 '구슬은 서 말인데 꿸 수 없는 보배'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CEO 사티아 나델라는 "엔비디아 최신 GPU가 남아돌아도 전력이 부족해 꽂지 못한다"라고 하소연한다.
게다가 늘어나는 AI 데이터센터로 인한 전력난으로 가정용 전기료까지 급등하자 다급해진 트럼프는 빅테크 기업에 스스로 전기를 구하라고 으름장을 놓기에 이르렀다. 빅테크 기업들은 태양광이든 풍력이든 원전이든 천연가스든 전기만 생산할 수 있다면 전력원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달려가는 형국이 됐다. 그런데 설령 전력을 생산해도 송전이나 배전 시스템이 낙후되거나 제대로 건설되지 않아서 난리를 겪는다. 유럽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에너지 공급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는데, 에너지난 못지않게 심각한 게 낙후된 송배전망 때문에 걸핏하면 벌어지는 대규모 정전 사태다.
한국 대학도 전력 부족으로 연구에 차질
한국도 이 문제가 남의 일이 아니다. 근래 논란이 되는 용인 반도체 산단 문제도 결국은 전력난으로 인해 대두됐다. 이미 부지로 선정돼 공사를 시작했는데 어떻게 옮기냐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지만, 막대한 전력을 어떻게 공급할 거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은 게 사실이다. 과거에 부지를 선정할 때 '전기' 문제를 제대로 고민해 해결하지 않고 미봉한 후폭풍을 지금 맞는 셈이다. AI가 중요하고 반도체가 필요하다니까 모두 근시안적으로 거기에만 관심을 두고, 그것들의 전제인 전기는 신경 쓰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다.
이는 정부나 기업만 신경 쓰면 되는 문제가 아니다. 대학도 이런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진다. 각 대학이 안정적 전력 공급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수만 명이나 되는 인구가 밀집해 활동하는 공간이라 전기가 많이 필요하기도 하고, 특히 이공계 학과와 연구소들은 연구 활동에 막대한 전기가 쓰인다. 즉 대학의 경쟁력이 기금이나 시설을 늘리는 일만큼 안정적 전력 공급에 따라 좌우된다. 이공계 학과와 연구소에는 전기가 가장 중요한 인프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AI 경쟁 시대에 국내 대학에는 최신 GPU가 없다고 지적하는 언론 보도가 자주 나왔는데, 설령 최신 GPU가 있어도 그걸 가동할 전기가 없어서 더 문제다.
정부가 지난 26일 대형원전 2기와 소형모듈원전(SMR) 1기 건설을 포함한 신규 원전 계획을 지난해 초 윤석열 정부에서 확정했던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대로 이어가기로 했다. 사진은 공사 중인 울산 울주군 새울 3·4호기 원전(옛 신고리 5·6호기) 모습. /뉴스1 © News1 윤일지 기자
전력난 해결 위해 종합적, 통합적 협력 필요
정부든 기업이든 대학이든 이런 전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를 쓰지만, 아직은 충분히 효과적인 대책이 마련돼 실현된다고 보기 어렵다. 이유는 각 지역과 이해 당사자 간에 발전, 저장, 송전, 배전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논의를 통한 협력 방안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다.
지방에서 원전으로든 신재생 에너지로든 전력을 많이 생산한다고 해도 주요 사용처인 서울·수도권과 협력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전력 생산보다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가는 게 송배전망 구축이고, 설령 전력망 구축 비용을 조달한다고 해도 송전탑이 지나는 지역 주민의 동의를 구하지 못하면 실행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생산된 전력을 저장하는 에너지 저장 시스템(ESS) 구축 문제는 전력난을 효과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또 다른 과제다.
그나마 정부나 기업은 근래 이 문제가 국가 차원의 관심을 받고 공론으로 떠오르니 이런저런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라도 하는데, 대학에서는 해결책 마련이 요원하다. 돈이나 시설 등 당장 눈에 가깝게 보이는 문제들 때문에 관심에서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다. 전기가 곧 대학의 가장 중요한 인프라이고, 대학의 경쟁력이 안정된 전력 공급에 좌우된다는 거시적 안목이 필요한 때다.
그래서 지금 다시 이런 슬로건이 필요할 듯하다. "바보야, 문제는 전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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