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원 삼표그룹 회장(가운데)이 10일 오후 의정부지방법원에서 열린 선고 공판 출석을 위해 법정으로 이동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최근 법원은 대표이사, 회장 등 직위·직함보다 실제 안전보건 업무에 대한 권한을 누가 가졌는지, 의사결정을 누가 했는지에 초점을 맞춘 판결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노동계는 이런 법원 판결이 최고 경영자에게 안전 책임을 묻기 위해 도입한 중처법 취지를 무색하게 하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 2023년 4월 한국제강 판결…대표 실형, “안전보건 최종 의사결정권자”
판례 흐름의 출발점으로 자주 언급되는 것은 창원지법 마산지원이 2023년 4월 선고한 한국제강 사건이다. 2022년 3월 경남 창원 한국제강 공장에서 설비 작업을 하던 노동자가 끼임 사고로 숨지자 검찰은 대표이사를 중처법 위반(산업재해치사) 혐의로 기소했다.
당시 재판부는 “피고인은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과 인력·예산 확보에 관한 최종 의사결정권자로서 필요한 조치를 다하지 않았다”고 판단하며 실형을 선고했다. 단순히 대표라는 직위 때문이 아니라, 실제 안전관리 체계 구축에 관한 권한을 행사했다는 점이 유죄 판단의 핵심 근거였다. 이 사건은 2023년 12월 대법원이 징역 1년을 확정해 중처법 위반 실형 1호로 기록됐다.
대표이사에게 중대재해처벌법상 책임을 인정한 또다른 사례로는 경남 고성 수리조선업체 삼강에스앤씨(S&C) 사건이 꼽힌다. 2022년 2월 19일 해당 사업장에서 선박 난간 보수 작업을 하던 50대 노동자가 추락해 숨지자 검찰은 당시 대표이사를 중처법 위반(산업재해치사) 혐의로 기소했다.
창원지법 통영지원 형사1단독은 2024년 8월 21일 선고에서 대표이사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재판부는 사고 이전에도 같은 사업장에서 잇따른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했고, 고용노동부 감독에서 다수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사항이 적발됐음에도 안전관리 체계 개선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특히 대표이사가 시간·비용 절감을 우선시하며 근로자 안전 확보를 소홀히 했고, 반복된 사고 이후에도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지적했다. 판결은 대표이사가 사업을 실질적으로 운영·총괄하는 지위에서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본 사례로, 중처법 시행 초기 경영진 책임을 폭넓게 인정한 판결로 평가된다.
◇ 올해 2월 10일 삼표 판결…회장·대표 무죄, 실무자는 유죄
논쟁의 중심에 선 판결은 올해 2월 10일 의정부지법 형사3단독이 선고한 삼표그룹 사건이다. 2022년 1월 29일 경기 양주 채석장에서 토사 붕괴로 노동자 3명이 숨지자 검찰은 정도원 삼표그룹 회장과 이종신 당시 대표이사를 중처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재판부는 정 회장에 대해 “삼표그룹의 규모와 조직에 비춰볼 때 피고인이 중대재해처벌법상 의무를 구체적·실질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또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린 사실만으로 사업을 총괄하는 권한과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당시 대표이사였던 이종신 전 대표에도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안전관리 체계의 미비가 곧바로 대표이사의 중대재해 예방 의무 위반으로 귀결된다고 보기 어렵고, 의무 위반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반면 현장 관리자와 안전 담당자 등 실무진에 대해서는 “사면 붕괴 위험을 인지하고도 위험성 평가와 안전조치를 하지 않았고, 현장 안전관리 체계가 실질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며 유죄 판단을 내렸다. 법원은 사고와의 직접적 인과관계를 실무 책임자에게서 찾았다.
문승용 기자
그러나 법원은 “안전보건최고책임자(CSO)가 안전·보건 업무 전반에 대한 전결권과 최종 의사결정권을 행사해 왔다”며 CSO를 경영책임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사업을 대표하고 총괄하는 권한과 책임이 있는 사람 또는 이에 준하여 안전보건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라는 법 조항을 근거로, 직함이 아니라 실제 권한 구조를 기준으로 책임 주체를 특정했다.
◇ “기준 정교화” vs “중처법 무력화”…노동계 강력 반발
이같은 판례 흐름에 대해 노동계는 중대재해처벌법의 취지를 약화시키는 판단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삼표그룹 사건 선고 직후 성명을 내고 “중처법 1호 재판에서조차 총수에게 책임을 묻지 않은 것은 법의 존재 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며 “최근 판결 흐름은 중처법을 사실상 무력화하고 기업 총수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노총 역시 “산업재해 예방은 기업의 의사결정 구조와 자원 배분 전반과 직결된 문제”라며 “최고 경영진의 책임을 좁게 해석할 경우 기업이 조직 구조를 통해 책임을 분산하거나 회피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지적했다.
노동계는 특히 대기업의 복잡한 지배구조를 고려할 때 경영책임자 범위를 좁게 해석할 경우 그룹 총수와 최고 경영자에 면죄부를 쥐어줌으로서 중처법 제정 취지와 충돌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반면 법조계 안팎에서는 최근 판결들이 중처법 적용을 일률적으로 완화한 것이라기보다, 경영책임자 판단 기준을 보다 구체화하는 과정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대표이사나 오너라는 직함만으로 책임을 단정하기보다 실제 안전보건 권한과 의사결정 구조를 따지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쟁점은 중대재해 책임을 어디까지 확장할 것인지에 모아진다. 산재 사망 사고에서 최고경영진까지 형사책임을 물을 것인지, 아니면 실제 안전관리 권한을 행사한 책임자 중심으로 처벌 범위를 정할 것인지에 따라 향후 중처법 적용 방향이 달라질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