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년간 ’유령 국민‘ 생활…한 경찰관의 관심 덕에 끝내
서울 영등포경찰서 영등포역파출소 소속 민수(45) 경위가 지난달 26일 기자와 인터뷰를 진행한 뒤 파출소 앞에 서 있는 모습이다. (사진=염정인 기자)
최씨가 이처럼 대한민국 국민으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게 된 물꼬를 튼 사람은 서울 영등포경찰서 영등포역파출소 소속 민수(45) 경위였다. 민 경위는 지난해 1월 노숙인 시설 영등포보현종합지원센터로부터 ’신원 확인이 어려운 여성 노숙인이 있다‘는 취지의 협조 요청을 받고 현장에 나갔다가 최씨를 처음 만났다. 당시 최씨는 오랜 거리 생활로 남루한 차림새는 물론 치아도 숭숭 빠져있었다고 민 경위는 회상했다.
민 경위는 경찰 내부망에서 ’최말분‘을 조회한 결과 어떠한 관련 기록도 나오지 않았다. 보다 정확한 신원 확인을 위한 지문 채취까지는 약 7개월이 걸렸다. 민 경위는 같은 해 8월까지 매일 최씨를 만나러 관내의 한 고가도로 아래 비닐 천막을 찾았다. 그는 “하루에 두 번씩 도보 순찰을 통해 거리 노숙인들을 살핀다”며 “그때마다 이름을 불러드리고 좋아하시는 식혜도 가끔 사드렸다”고 말했다. 최씨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경찰관을 경계하기보다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맞이했다고 했다.
하지만 휴대용 지문 스캐너를 통해서도 최씨의 신원은 파악되지 않았다. 아예 처음부터 출생신고 등 가족관계등록은 물론 주민등록조차 안 된 이른바 ’무적자‘였기 때문이다. 통상 긴 시간 실종돼 사망 처리된 무적자는 실종선고 취소 청구 등을 진행하는 것만으로 신분을 회복할 수 있다. 반면 주장할 만한 원가정조차 없는 최씨는 새로 성과 본을 창설하는 ’성본창설‘까지 거쳐야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기억을 몽땅 날린 사람에게 삶을 증명하라니”
법원의 주된 관심은 청구인이 실제 대한민국 국민인지 여부다. 외국인이 편법으로 국적을 취득하려는 시도가 아닌지 가려내야 해서다. 이 때문에 ’공식 문서‘의 존재여부가 매우 중요하다. 가령 어린 시절 아동복지기관에 머문 흔적이나 의료기관에서 치료를 받은 기록 등이 요구된다. 태초의 기록이 없어 무적자가 됐더라도 법정은 증거 싸움이기 때문이다.
민 경위는 최씨의 삶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으려 고군분투했다. 최씨는 인지 기능의 저하로 10대 무렵부터 최근까지의 기억이 거의 날아간 상태였다. 민 경위는 “최씨는 삶의 궤적이 독특한 분이다. 병원에서 치료 한 번 받은 적이 없었다”며 “기억을 되짚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삶을 증명하기란 쉽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끝까지 노력을 기울인 민 경위는 한 가지 단서를 얻었다. 최씨가 전라도 광주에서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니다 그만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다. 민 경위는 곧장 해당 학교에 공문을 보내 확인한 결과 진술과 일치하는 ’중퇴생 최말분‘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최씨가 밝힌 자신의 생년월일과 부모의 이름이 생활기록부상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었다. 최씨는 법원에서도 ’초등학교를 다닌 적이 있느냐‘는 판사의 물음에 생뚱맞거나 사실과 다른 대답을 내놓기도 했다. 흐릿한 데다가 오락가락한 기억 탓이다.
최씨를 대리한 박소연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 변호사는 “법원이 구체적으로 어떤 자료를 근거로 허가했는지는 알 수 없다”면서도 “청구인의 기억이 조각나 진술과 자료가 그대로 일치하지 않더라도 내국인임을 입증할 자료가 충분하다면 이 같은 결정을 내리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초교 중퇴 기록‘ 외에도 주변인 진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강수 영등포보현종합지원센터 팀장은 2011년 무렵 최씨가 영등포역 뒤편의 광야교회에서 합동 결혼식을 올렸던 사실을 기억하고 이를 법원에 진술했다. 당시 교회 측이 쪽방 주민을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또한 민 경위도 최씨가 전라도 사투리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점을 들어 내국인이 틀림없다고 증언했다.
서울남부지법은 지난 2월 최말분(가명)씨의 가족관계등록창설 신청을 인용했다. 이에 따라 약 70년간 무적자(無籍者)로 살았던 최씨는 신원을 회복하게 됐다. (사진= 본인 제공)
법원은 청구인이 대한민국 사람이라고 판단할 자료가 충분하다면 증거를 재량껏 판단하고 있다는 게 전담 변호사들의 설명이다. 현실적으로 무적자 중에서는 자신이 태어난 장소나 날짜 등을 정확히 기억하는데 한계가 있는 사람이 많아서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인우 보증서‘를 중요하게 보고 있는 추세다. 이는 박 팀장이나 민 경위처럼 주변 인물이 청구인의 인적사항이나 개명·출생 등 사실관계를 증명하는 서류를 말한다.
백주원 서울사회복지공익법센터 변호사는 “(최씨처럼) 대부분의 기억이 없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보통 무적자분들은 오랜 노숙 끝에 (센터에) 오다 보니 정신적으로도 위태로운 분들이 많다”며 “진술도 쉽지 않아 입증 절차도 지난한 편”이라 말했다.
박 변호사도 “최씨에게는 인우 보증서를 선뜻 써줄 사람이 주변에 있었다”며 비교적 여건이 나은 사례라고 밝혔다. 이어 “아무리 무적자라도 그 사실을 주변에 알리기 꺼리는 사람이 많다”며 “설령 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인감증명서 등이 필요한 법적 절차를 흔쾌히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게 현실”이라 지적했다.
대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가족관계등록부 창설‘ 접수 건수는 지난해 698건에 달했다. △2021년 962건 △2022년 426건 △2023년 609건 △2024년 665건 등 매년 꾸준하다. 여기에는 최씨와 같은 무적자뿐만 아니라 ’베이비박스‘에 유기된 아동이나 탈북민 등의 사례도 포함돼 있다.
무적자만 별도 집계한 통계는 없는 상황이지만 이들을 가까이서 지켜본 관계자들은 “매년 무적자가 발견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일찍 세상을 떠난 형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부터 출생신고도 없이 줄곧 길거리를 떠돈 사람 등 여러 이유로 ’무적자‘가 된 이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는 설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