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 모습. © 뉴스1 사진공동취재단
대법원 상고심에서 심리도 없이 기각된 제약사의 항변이 재판소원 제도 시행 47일 만에 처음으로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의 판단을 받게 됐다. 헌재가 재판소원 525건 중 유독 이 사건을 첫 심판 대상으로 삼은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헌재는 전날(28일) 제약사 녹십자가 제기한 재판소원 사건을 전원재판부에 회부했다. 지난 27일까지 접수된 525건 가운데 265건은 지정재판부 단계에서 각하됐다.
녹십자는 공정거래위원회의 과징금 처분을 둘러싼 행정소송에서 대법원이 심리불속행으로 상고를 기각한 판결을 취소해달라면서 재판소원을 청구했다.
"형사·행정 판단 엇갈렸는데 심리 없이 기각"…'단순 불복'과 구별·논란 적은 선택
헌재가 이 사건을 1호 심판 대상으로 선택한 배경에는 다른 사건들과 결정적인 성격 차이가 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헌재는 그동안 접수된 재판소원 사건 상당수가 '판결이 잘못됐다'라거나 '법원이 법리를 오해했다'는 식의 주장에 그친다고 판단했다. 재판 결과를 뒤집어달라는 사실상 4심 청구다.
그에 비해 녹십자 사건은 재판 절차를 문제 삼고 있다. 대법원이 상고심에서 본안 심리 없이 상고를 기각하는 '심리불속행' 제도를 이 사건에 적용한 것 자체가 위법이었다는 주장이다.심리불속행 기각은 원심판결에 법 위반 등 사유가 없다고 판단하면 본안 심리 없이 상고를 기각하는 절차다.
상고심절차에 관한 특례법 제4조는 원심판결이 헌법·법률 위반을 부당하게 판단한 경우, 대법원 판례와 상반되게 해석한 경우, 대법원 판례를 변경할 필요가 있는 경우 등이 상고이유에 포함될 경우 심리불속행을 허용하지 않는다.
녹십자 측은 해당 사건의 상고이유에 이 같은 예외 사유가 포함돼 있다고 주장했다.특히 같은 입찰 구조를 두고 형사재판에서는 '실질적 경쟁관계가 없다'며 무죄가 선고된 반면, 행정소송 원심은 이를 인정해 과징금 처분을 유지하는 상반된 판단이 내려진 점을 근거로 들었다.
이는 재판 결과의 당부를 다시 판단해달라는 요구가 아니라 재판 과정에서의 절차적 위헌성을 따져달라는 주장으로, 헌재가 재판소원 심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전형적인 유형에 해당한다는 분석이다.
헌재 출신의 한 변호사는 "헌재 입장에서는 재판소원이 '4심'으로 흐르는 것을 가장 경계할 수밖에 없다"며 "첫 본안 사건으로 재판 절차의 위헌성을 문제 삼는 사건을 택한 것은 재판소원의 역할을 헌법 통제로 한정하겠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한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논란이 적은 유형에서 출발하겠다는 선택이라는 해석도 있다. 헌재는 재판소원 청구 사유를 크게 △헌재 결정에 반하는 취지로 재판한 경우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경우 △헌법·법률을 위반한 경우로 나누고 있다.
이 가운데 첫 번째와 세 번째는 결국 판결 내용을 들여다봐야 판단할 수 있어 4심 논란을 피하기 어렵고, 법원과의 마찰로 비칠 여지도 있어 첫 사건이 가져올 파장을 의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민원실에 재판소원 관련 안내문이 비치돼 있는 모습. 2026.3.25 © 뉴스1 이호윤 기자
형사와 행정재판 판단 엇갈린 사건…'이유 안 밝힌 채 기각' 심리불속행 운용 경계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판결을 확정하는 심리불속행 제도의 구조적 특성이 영향을 줬을 가능성도 있다.
재판을 받을 권리 침해를 문제 삼기 용이하다는 면에서 심리불속행 기각 사건이 첫 재판소원 심사 대상이 될 것이란 전망은 제도 시행 초기부터 꾸준히 제기돼 왔다. 실제로 헌재에는 심리불속행 기각 뒤 재판소원을 청구한 사례가 다수 접수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단순히 '심리를 하지 않은 것이 부당하다'는 주장만으로는 본안 심리로 이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자기 사건이 심리불속행이 허용되지 않는 사유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이를 뒷받침할 객관적 근거가 기록상 드러나는 경우는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녹십자 사건은 형사재판과 행정재판에서 엇갈린 판단이 내려졌다는 점을 각각의 판결문으로 확인할 수 있다"며 "심리불속행 적용의 적정성을 별도의 사실 판단 없이도 검토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춘 점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번 사건이 심리불속행 제도 자체의 위헌 여부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헌재는 2007년, 2011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이 제도를 합헌으로 결정한 바 있다.
또 다른 헌법연구관 출신 변호사는 "심리불속행은 대법원의 사건 처리 부담과 직결된 제도라 그 자체를 건드리기는 쉽지 않다"면서도 "이 사건에 그 적용이 가능한지를 따지는 방식으로 접근한 것은 제도 자체가 아니라 운용의 경계를 설정하겠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전원재판부 회부가 곧바로 인용 가능성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데에도 무리가 있다. 사전심사는 심판 대상 여부를 가리는 절차일 뿐 실제 본안 판단에서는 별도의 법리 검토가 이뤄진다.
다만 이번 심판 회부를 계기로 재판소원 청구 전략에는 변화가 예상된다. 단순한 판결 불복보다 재판 절차에서의 기본권 침해를 중심에 놓은 다툼이 늘어날 수 있고, 이번 사건처럼 형사·행정 재판 간 법리 충돌 등 구체적이고 확인 가능한 절차적 하자를 입증하는 방식의 청구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saem@news1.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