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여고생 흉기 피살사건 추모 공간에 남겨진 문구는 10년 전 강남역 10번 출구를 가득 메웠던 포스트잇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 여성들은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여자라서 죽었다”는 문장을 남기며 비통함과 불안을 쏟아냈다.
지난 7일 고교생 흉기 살인사건이 발생한 광주 광산구 월계동 현장에 마련된 추모공간에서 한 시민이 노란 리본에 적힌 메시지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당시 여성들이 마주했던 공포의 실체는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외딴 골목길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도심 한복판, 매일 오가던 지하철역 근처처럼 너무 익숙해서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공간들이었다. 이 사건은 여성 대상 폭력을 ‘개인의 불운’이나 ‘우발적 범죄’가 아닌 구조적 문제로 바라보게 만든 전환점이 됐다.
긴 시간이 흘렀지만 공포감은 크게 해소되지 않았다. 지난 5일 광주에서 발생한 여고생 피살 사건 역시 ‘일면식 없는 남성’에 의한 ‘귀갓길 습격’이라는 점에서 강남역 사건의 악몽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특히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범행 경위는 더욱 섬뜩하다. 피의자는 교제 요구를 거절한 여성에게 앙심을 품고 30시간 넘게 주거지와 직장 주변을 배회하다 결국 범행 대상을 바꿨다. 분노의 끝이 귀가 중이던 일면식도 없는 여고생에게 향한 것이다.
강남역 살인 사건도 그랬다. 가해자는 화장실에 들어온 6명의 남성을 그대로 보내고, 7번째로 들어온 여성을 살해했다. 두 사건은 시간과 장소는 다르지만 동일한 질문을 남긴다. 단지 그 순간, 그 자리에 여성으로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범죄의 표적이 되어야 하는가.
다만 여성들이 마주하는 위험의 행태는 이전보다 더 복잡하고 집요해졌다. 과거에는 ‘낯선 남성’에 대한 공포가 컸다면 이제는 스토킹과 교제폭력, 이별 범죄처럼 ‘관계 기반 폭력’이 불안의 중심에 있다.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은 이제 낯설지 않다. 집요한 연락과 감시, 통제와 집착이 결국 살인으로까지 번지는 비극이 반복되고 있어서다.
폭력은 디지털 공간으로도 확장되고 있다. 딥페이크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감시, 위치 추적, 온라인 유포 협박 등 관계가 끝난 뒤에도 위협은 끈질기게 이어진다. 여성 대상 폭력은 더 장기적이고 파괴적인 형태로 변하고 있다. 이제 여성들은 물리적 공간뿐 아니라 가상 공간에서도 숨을 곳 없는 공포를 마주한다.
강남역 사건 이후 스토킹처벌법을 제정했고 피해자 보호 체계도 확대했다. 하지만 이런 제도적 변화가 여성들이 체감하는 안전으로 이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물음표가 남는다.
광주에 다시 붙은 포스트잇은 우리 사회에 같은 질문을 던진다. 언제까지 여성들이 ‘우연한 생존’에 안도하며 살아야 하는가.
이제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대책 발표가 아니라 위험 신호를 즉각 감지하고 차단할 수 있는 정교한 시스템이다. 여성 대상 폭력을 개인의 비극으로 넘기지 않고 어떤 우연도 죽음의 이유가 되지 않게 하기까지 우리 사회의 책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양지윤 사회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