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치성 및 신경염증 환자에서 특정 면역 바코드가 집중 증식하며 다양성은 감소했다. AI 기반 모델은 혈액 데이터만으로 80% 정확도로 뇌전증을 감별했으며, 면역 다양성 감소는 뇌 시상과 기저핵 위축과도 관련됐다.
서울대병원 신경과 주건·이상건 교수, 중환자의학과 신용원 교수, 입원의학센터 홍상빈 교수(現 임상유전체의학과) 공동 연구팀은 뇌전증 환자와 건강한 일반인 총 100명의 말초혈액을 채취해, 혈액 내 면역세포인 ‘T세포’가 가진 고유한 수용체 서열을 대규모로 분석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고 26일 밝혔다.
뇌전증은 뇌 신경망의 비정상적인 전기 활동으로 경련과 발작이 반복되는 복잡한 신경 질환이다. 그동안 주로 뇌 자체의 문제로만 여겨졌으나, 최근에는 전신 면역 체계의 이상이 발병에 깊이 관여한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 질환을 진단하고 중증도를 평가하려면 긴 시간이 걸리는 복잡한 검사에 의존해야만 해, 간편한 혈액 검사 방식의 진단 지표 도입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에 연구팀은 외부의 병원균과 싸우는 우리 몸의 핵심 방어군인 T세포에 주목했다. 혈액 속 T세포 표면에는 적을 식별할 수 있는 고유한 유전자 서열 구조인 수용체(TCR)가 존재하는데, 이는 마치 상품마다 각기 다른 정보를 담고 있는 바코드와 같아 일종의 ‘면역 바코드’로 불린다. 평상시 건강한 사람의 혈액에는 다양한 적에 대비하기 위해 수많은 종류의 면역 바코드가 골고루 존재한다. 그러나 몸속에 특정 병원균이 침입하여 이를 인식한 맞춤형 T세포 군대만 비정상적으로 집중 증식하게 되면, 한정된 혈액 내에서 전체 면역 바코드의 가짓수와 다양성은 오히려 줄어드는데 이를 면역학적으로 ‘클론 확장(Clonal expansion)’ 현상이라 한다.
연구팀은 뇌전증 역시 전신적인 적응면역 체계의 활성화를 동반하는 질환이라면, 환자의 혈액 속에서도 이처럼 특정 면역 바코드만 비정상적으로 증식하여 전체적인 다양성이 감소하는 현상이 관찰될 것으로 가설을 세웠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연구팀은 뇌전증 환자 45명과 건강한 대조군 55명 등 총 100명의 말초혈액을 채취해 심층 분석을 진행했다. 특히 뇌전증 환자군은 ▲약물 조절 양호 환자(WCE) 14명 ▲난치성 환자(DRE) 22명 ▲신경염증 관련 환자(NIE) 9명으로 세분화해 질환의 중증도에 따른 차이를 살폈다.
건강 대조군과 뇌전증 환자군의 면역 바코드 비교. 건강 대조군에 비해 뇌전증 환자군(특히 약물 난치성 및 신경염증 관련 뇌전증)에서 전반적인 면역 다양성은 뚜렷하게 감소(파란색 박스)하는 반면, 특정 면역세포의 비정상 증식은 가파르게 증가(빨간색 박스)하는 상반된 양상을 보였다.
나아가 연구팀은 최적의 인공지능 진단 모델을 개발하기 위해 18가지의 면역 데이터 조합에 9종의 머신러닝 알고리즘을 적용하여 총 162개의 진단 예측 모델을 구축했다.
분석 결과, 환자의 나이나 성별 등 부가 정보 없이 오직 T세포 수용체의 ‘유전자 조합 패턴(V, J 유전자)’ 데이터만을 집중적으로 학습시킨 모델(랜덤 포레스트 알고리즘)이 가장 뛰어난 감별 능력을 보였다. 이 최적의 모델은 혈액 분석 데이터만으로 뇌전증 환자와 건강한 일반인을 평균 80%의 높은 정확도로 감별해 냈다. 또한, 인공지능 예측의 전반적인 변별력과 신뢰도를 나타내는 곡선하면적(AUC) 수치 역시 0.80을 기록하며 비침습적 진단법으로서의 우수한 성능을 입증했다.
면역 바코드 다양성과 뇌 핵심 구조물 위축의 상관관계. 전반적인 면역 다양성이 낮아질수록 뇌의 핵심 부위인 '시상'과 '기저핵'이 뚜렷하게 위축(파란색 박스)되는 경향이 확인됐다.
신용원 교수(중환자의학과)는 “혈액 속 면역세포의 변화가 뇌의 구조적 위축과 연관된다는 점을 확인한 것은 의미가 크다”며 “뇌전증 환자의 경과를 모니터링하고, 향후 면역 조절을 통한 새로운 치료 전략을 모색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건 교수(신경과)는 “뇌전증은 그동안 뇌 자체의 문제로만 국한돼 인식되어 왔으나, 이번 연구는 전신 면역 시스템의 관점에서 질환을 바라봐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며 “환자 개개인의 면역 상태에 기반한 정밀 의료를 실현하는 데 한 발짝 더 다가섰다”고 강조했다.
이번 연구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한국연구재단의 기초연구사업 우수신진연구 지원을 받아 수행됐으며, 국제 학술지인 ‘임상 및 중개 신경학 연보(Annals of Clinical and Translational Neurology)’ 최근호에 게재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