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탈정치화가 심화하면서 지난 2010년대 이후 총학생회 구성에 조차 어려움을 겪는 대학들이 늘어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으로 평가받는다. 여전히 정파성에 거리를 두면서도 ‘공정’에 반하는 사회 현상에 대해선 분노하는 청년 세대의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으로 해석된다.
10일 서울 마포구 홍익대 캠퍼스 내에 '투표 용지 없는 투표소'가 설치돼 있다. (사진=김태섭 수습기자)
건국대·고려대·경희대·서강대·서울대·연세대(가나다순) 등 18개 대학 총학생회는 6·10 민주항쟁 기념일인 이날 오후 6시 각 캠퍼스에서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특정 정당이나 정치적 이해관계가 아닌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국민 주권을 침해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국정조사·특별검사를 통한 진상조사 및 책임자 처벌 △국가 기본권 침해 구제 대책 마련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구조개혁 △시민 참여형 개혁 감시기구 설치 등을 촉구했다.
최근 대학가의 분위기를 보면 이 같은 주요대학의 일제 시국선언은 이례적이다. 1980~90년대 대학가의 시국선언은 연합체 형식으로 이뤄진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대학생들이 학내 정치에 큰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학생회 조직은 힘을 잃었다.
심지어 2010년대 후반부터 투표율이 저조하거나 입후보자가 없어 총학생회 구성이 무산되는 사례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재도 서울대 총학생회는 입후보자가 없어 단과대 학생회장 연석회의 체제로 운영 중이다. 연세대와 고려대 총학생회 역시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학생 자치기구의 활동이 정치색을 갖는 것에 대한 반감과 학생들 개개인에게 실질적인 효능감을 가져다 주지 못한 데 따른 무용론이 무관심으로 이어진 탓이다. 고려대에 재학중인 이상윤(24)씨는 “총학생회가 하는 일 중에 와닿는 건 축제뿐”이라며 “그외엔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게 없다고 생각하니 관심도가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대해 대학가가 함께 목소리를 내는 건 공정성과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사안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앞서 ‘조국 사태’와 ‘계엄 사태’ 등 문제에도 대학가가 한 목소리를 냈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서울대 공대에 재학중인 이모(27) 씨는 “청년들의 목소리가 실제 정치에 담기게 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투표 뿐”이라며 “이 과정에서 부실이 발생한다는 건 정말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청년들에게 중요한 건 공정인데 공정이 무너진 상황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려대에 재학생인 이호석(24) 씨는 “소위 조국 사태나 계엄 사태, 투표용지 부족 사태처럼 심각하고 큰 사안일 때 사회에 경고하는 게 대학생의 역할”이라며 “총학생회가 사회 모든 사안에 목소리를 내는 건 오히려 정치집단화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메시지가 중립적이라고 판단될 때에는 참여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10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학교 알바트로스탑 앞에 시국선언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히며 학생들이 벗어둔 학과 점퍼가 놓여 있다. (사진= 연합뉴스)
하지만 여전시 대학생들의 목소리가 특정 정파에 휘둘리거나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에 대해 큰 반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실제 이날 서울대에서는 총학생회의 공동 시국선언이 극우성향 학생단체 트루스포럼과 연계돼 있다는 오해가 퍼지며 학생회 측에서 해명에 나서기도 했다.
공동 시국선언에 참여한 홍익대 부총학생회장인 이현빈(24) 씨는 “공동 행동에 참여하는 대학들이 하나같이 이야기하는 건 이번 사안은 좌우 진영의 이권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인 참정권이 침해된 상황이란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학생들도 계엄 사태를 거치며 사회적 이슈가 본인의 삶에 직결되는 문제라고 인식하게 되면서 더 분노가 커진 것 같다”고 말했다.
연세대 재학생 정모 씨도 “청년들은 특히 평등이란 가치에 굉장히 예민하다”며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정당이나 이념을 초월한 사건인 만큼 청년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가들 역시 이번 대학가의 움직임은 청년들의 가치 변화와 연관이 있다고 보고 있다.
김중백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2030세대는 다른 세대보다 더 명확하고 이해가능한 것들을 원하는 경향이 있다”며 “이번 사태는 권리침해 뿐만 아니라 그냥 넘어갈 수 있었던 부정이 드러나고 이것들을 감추려고 했다는 것에서 청년층이 더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도 “신자유주의의 특성 중 하나가 모든 규율을 개인에게 내면화하도록 요구하고 개인들은 자신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그 규율이 깨졌을때 분노하게 되는 것”이라며 “사회 질서를 가장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집단으로 볼 수 있는 대학생들이 국가가 지켜야 하는 규율을 어긴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