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매체인 ‘디지털애셋’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미국 정부·ETF 운용사·기업들이 보유한 비트코인 수량은 약 279만 9355개다. 한화로 약 275조원에 달하는 거액이다. 비트코인 전체 유통량의 14%가량이 미국에 있다는 것이다. 작년 트럼프 대통령은 압수한 비트코인을 전략자산으로 비축하기 위해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최근 이를 법으로 명문화하는 아르마(ARMA) 법안이 하원에 발의돼 있다. 이는 미국이 디지털자산 시대의 ‘디지털 골드(Digital Gold)’를 선점하고 디지털자산 산업의 중심국 지위를 굳히려는 목적이다. 비트코인 비축과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확대는 모두 디지털 금융 질서를 달러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하나의 전략에서 나온 두 축이다.
전통 금융권인 월가도 디지털자산을 새로운 금융 영역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전통 금융과 온체인 금융이 연결되고 있다. JP모건은 지난해 말 토큰화 머니마켓펀드(MONY)를 출시한 데 이어 올해 두 번째 펀드(JLTXX)까지 내놓았다. 골드만삭스는 비트코인 인컴 ETF를 출시하기 위해 SEC에 등록 서류를 제출했다. 모건스탠리는 E*Trade를 통한 암호화폐 거래 서비스를 준비 중이다. 블랙록의 디지털자산 플랫폼은 5년 내 연 5억 달러 수익 창출을 목표로 한다.
미국 정부와 의회는 디지털자산과 관련된 새로운 규칙을 쓰고 있다. 작년 지니어스법(GENIUS Act)으로 달러 스테이블 코인이 법제화됐다. 비자는 USDC 기반 국경 간 결제를 상용화했고 마스터카드는 스테이블 코인 결제 통합 파일럿을 확대 중이며 페이팔은 자체 스테이블 코인 PYUSD를 결제·송금에 직접 활용하고 있다.
지난 5월 상원 은행위원회를 통과한 클래리티법(CLARITY Act)은 규제 모호성이라는 최대 리스크를 해소하는 핵심 법안이다. ‘탈중앙화가 충분한 자산’은 상품선물위원회(CFTC)가 관할하지만 ‘탈중앙화가 충분하지 않은 자산’은 증권거래위원회(SEC)에 등록 및 공시의무를 진다. 통과 시점은 불확실해도 결국 제정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통과되면 파급력은 미국 국경을 넘는다. 월가 대형 기관의 본격 진입, 달러 스테이블 코인 수익 배분 규칙 정비로 국경 간 결제 인프라가 재편되고 EU의 미카(MiCA)와 함께 글로벌 디지털자산 규율의 양대 축이 형성된다.
신중함의 대명사였던 일본도 이미 달리고 있다. 2020년 금융상품거래법 개정으로 토큰증권의 법적 기반을 마련했고 엔화 스테이블 코인은 정식 인가를 받았으며 국채 토큰화 컨소시엄까지 출범시켰다. 인공지능(AI) 에이전트가 스테이블 코인으로 자율 결제하는 서비스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해외에서 계속 출시되고 있다.
한국은 글로벌 금융의 흐름을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가. 연간 160조원 규모의 디지털자산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현실은 국내 규제가 디지털자산 ETF·파생상품 등 다양한 금융상품을 허용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법인의 디지털자산 투자도 사실상 금지돼 있고 원화 스테이블 코인 도입은 검토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디지털자산기본법’의 입법은 지연되고 과세 기준은 여전히 불명확하다. 혁신 사업 모델은 싱가포르·UAE 등 규제가 유연한 해외로 빠져나간다.
제도는 실물 경제와도 동떨어져 있다. 외국인 근로자가 임금을 달러 스테이블 코인으로 요구하는 사례가 늘지만 기업은 대표자 개인 계좌를 빌려 쓰는 비정상적 관행으로 내몰린다. 달러 스테이블 코인 결제를 요구받는 수출입 기업도 늘지만 국내에서 직접 처리할 길이 없어 외국 은행을 거치는 우회 송금이 동원된다.
스테이블 코인과 해외 가상자산사업자(VASP)를 통한 자금 이동은 외국환은행을 거치지 않고 개인 간 또는 역외 거래소를 통해 이뤄진다. 신고·보고 체계는 형해화되고 원화 연동 스테이블 코인이 역외 거래소에서 유통되는 순간 우리 금융당국의 감독권을 벗어난다. 규제만으로 원화 패권을 지키겠다는 발상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디지털자산 시장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기본 질서는 허술하기 짝이 없다.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으로 디지털자산 분류체계를 확립하고 법인의 디지털자산 취득을 허용해야 한다. 전통 금융기관의 수탁·결제·지갑 인프라 참여도 이뤄져야 한다. 에어드롭·스테이킹 등 무상 수취 소득의 과세 기준 명확화와 회계처리의 유연성, 파생상품 허용과 자금세탁방지 체계 정비도 결국 같은 방향의 퍼즐 조각이다.
미국은 ‘디지털자산의 제도화’를 향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그 목표는 △달러 스테이블 코인 시장의 확대 △주식을 포함한 모든 자산의 토큰화 △은행을 비롯한 전통 금융기관의 디지털자산 시장 진입 △국가전략 차원에서 비트코인의 비축 등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글로벌 금융시장의 변화를 따라가지 않고는 우리 금융시장을 지키기 어렵다. ‘디지털자산의 제도화’를 서두르지 않으면 미국이 쓴 규칙 안에서 원화가 점점 보이지 않는 시대를 지켜보게 될지도 모른다. 두려움이 앞서면 혁신이 어렵다. 혁신하지 않으면 도태한다.
■김기동 대표변호사 = 25년간 검사로 재직하면서 대검 부패범죄특별수사단장, 방위사업비리 정부합동수사단장, 원전비리수사 단장, 중앙지검 특수1부장 등 중요 수사 부서 책임자를 도맡았다. 기업·금융 분야 로펌 로백스(LawVax)를 설립해 대표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금융 전문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