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손들고 발언하자[최기훈의 외국계기업 생존기]

사회

이데일리,

2026년 6월 27일, 오전 08:10

외국 생활 경험없이 외국계 기업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국내 기업에서 10년 가까이 일한 뒤 30대 후반에 외국계 기업으로 옮겨 고위 임원까지 지낸 금융인은 흔치 않다. 저자가 들려주는 외국계 기업의 문화와 업무 방식, 그 안에서 부딪히고 배운 생생한 장면들은 외국계 기업 취업과 커리어 전환에 관심 있는 2030 독자들에게 현실적인 길잡이가 될 것이다. [편집자 주]


최기훈 사진2
[최기훈 아자스쿨 이사] 처음으로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게 된 지 얼마되지 않아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마케팅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들과 전화로 회의하는 컨퍼런스 콜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영어가 아주 서툴었고 혹시 주제와 어긋나는 엉뚱한 이야기를 할까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회의 직후에 홍콩에 있는 내 직속 상사가 나에게 “너 좀 전 컨퍼런스 콜에 왜 안 들어왔니?”라고 물었다. 내가 참석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질문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의견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들어온 것과 같다”고 했다. 당황스럽고 모욕스럽기도 했으나 외국계 기업에서는 반드시 한마디하고 존재감을 보여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 계기였다.

외국계 기업의 워크숍은 조별 토의와 발표의 연속이다. 문제는 영어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년도 글로벌 마케팅 우선 과제’, ‘우리가 해결해야 할 조직의 오래된 문제’ 등과 같은 광범위하고 추상적인 주제를 놓고 토론해야 한다. 영어가 능통하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그나마 아시아권 국가 사람들과 모이는 곳에서는 억양이 익숙하기도 하고 또 다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니 서로 배려하는 경우가 많아 어느 정도 대화의 흐름을 따라잡고 그에 맞춰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런던에서 열린 행사에서 미국, 유럽, 중동, 아프리카 등 다양한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각자의 스타일로 빠르게 말하는 내용을 따라잡기는 쉽지 않았다. 토론에 익숙해서 그런지 다들 말이 많고 서로 발언하려고 다투기도 한다. 대화의 흐름을 파악해 내가 할 말을 영어로 정리한 다음 입을 열어야 하는데 생각하다 보면 금세 대화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곤 했다. 한마디 해야 하는데 하는 초조한 모습을 남들이 눈치챌까 부끄럽기도 했다. 특히 직속상사가 나랑 같은 조에 있을 때는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깨달은 첫 번째 해결책은 ‘먼저 손들고 발언하라’는 것이었다. 어떤 주제가 주어지고 토론이 시작되자마자 먼저 내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대화의 흐름과 수준을 살펴보고 그에 맞춰 내 의견을 말해야지’ 하다가는 자칫 때를 놓치기 쉽다. 다행히 대부분의 경우 ‘토론에서 모든 의견은 소중한 것이고 다른 사람의 말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암묵적 규칙이 있다. 일단 먼저 한 마디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다가 기회가 되면 추가 발언을 할 수도 있다. 조별토의 내용을 전체 앞에서 발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첫 토의에서 “우리 조에서는 누가 발표할까?”라는 얘기가 나오면 먼저 자원해서 맡자. 논의 주제가 뒤로 갈수록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다. 한 번 이상은 반드시 해야 하는데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

다른 사람의 발언에 연결해서 내 의견을 말하는 방식도 자주 쓴다. “A의 의견에 동의(Echo)한다”고 하면서 내 의견을 추가하면 흐름상 무난하다. A의 주목을 끌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외국계 기업의 워크숍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좀 튀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도 내 존재감을 보이는 데 효과적이다. 몇 년 전 싱가포르에 모여 나라별 마케팅 전략을 발표하는 자리가 있었다. 내가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면서 “한국은 내년에 BTS를 활용할 예정이다”고 했더니 그 순간 엄청난 반응이 나왔다. 다들 집중했다. BTS를 광고 모델로 활용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국은 그럴 만한 예산이 있는지, 다른 나라에서도 활용할 여지가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내가 “BTS는 브랜드(Brand), 기술(Technology), 세일즈(Sales)를 의미하는데”라고 하며 발표를 이어가자 모두가 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워크숍 내내 나를 만나는 외국인들마다 그 발표 얘기를 하면서 웃었다. 발표 자료에 ‘오징어게임’, ‘기생충’, ‘블랙핑크’, ‘케이팝 데몬 헌터스’처럼 전 세계가 다 아는 K-콘텐츠를 넣어 주목을 끌 수 있는 것은 한국만의 특권이다.

프레젠테이션을 듣고 나면 질문을 하는 것도 좋은 습관이다. 질문도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좋다.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볼지 고민하지 말고 그냥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된다. 누구도 질문 수준이 낮다고 비웃을 수 없다. 외국에서 출장 온 사람이 한국 직원들을 모아 놓고 자신의 업무에 대해 발표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항상 먼저 질문했다. 그랬더니 한 번은 진행하던 한국 CEO가 “최기훈 말고 먼저 질문할 사람 있나?”라고 해서 참석자들이 웃은 적이 있다. 조직 문화에 적응하는 것 같아 안도감이 들었다. 외국계 기업에서 신중하고 겸손한 것이 항상 미덕은 아니다.

■최기훈 이사 =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하나은행, 미래에셋증권, 피델리티자산운용, 신한BNP파리바자산운용, SC제일은행 등 금융권에서 30여 년을 근무하고 지금은 국내 최대 체험학습 플랫폼 아자스쿨에서 최고전략책임자(CSO)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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