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버리가 되어라[최기훈의 외국계기업 생존기]

사회

이데일리,

2026년 7월 27일, 오전 08:20

외국 생활 경험없이 외국계 기업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국내 기업에서 10년 가까이 일한 뒤 30대 후반에 외국계 기업으로 옮겨 고위 임원까지 지낸 금융인은 흔치 않다. 저자가 들려주는 외국계 기업의 문화와 업무 방식, 그 안에서 부딪히고 배운 생생한 장면들은 외국계 기업 취업과 커리어 전환에 관심 있는 2030 독자들에게 현실적인 길잡이가 될 것이다. [편집자 주]


최기훈 사진2
[최기훈 아자스쿨 이사] 미국계 기업으로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내가 속한 마케팅부와 세일즈부 회의에서 고객을 호텔로 초대해 세미나를 개최하자는 말이 나왔다. 회의가 끝나고 나오자마자 나는 먼저 전화기를 들고 몇몇 호텔에 전화해 행사장 이용이 가능 날짜와 대여 비용 등을 알아보았다. 내부적으로도 홍콩에 이메일을 보내 발표자를 선정해 달라고 요청을 하고 초대장 디자인에도 착수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움직이는 소위 빠릿빠릿하다고 칭찬받는 모습이었다.

이런 나를 무척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지켜보던 미국인 직속상사가 나를 불렀다. 이 사람은 나와 반대로 미국 밖의 사람들과 일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는 “그렇게 일하면 안된다. 이게 아주 급한 일도 아니고 먼저 1페이지 요약본(one-pager)을 만들어 공유하고 피드백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일단 그 ‘요약본’이 무엇인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 것인지부터 알 수가 없었다.

그 상사 옆에 붙어 앉아 배웠다. 새로운 일에 착수할 때는 그 일의 핵심 내용을 담은 문서를 만들어 관련되는 사람들에게 보내고 의견을 요청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알려 주는대로 호텔 세미나를 생각하게 된 배경, 목적, 초대 대상, 세미나에 담을 내용, 핵심성과지표(KPI), 예산, 준비 일정, 예상되는 어려움과 도움이 필요한 내용 등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조언과 지원을 바란다”는 내용을 담아 한국 내 관련자뿐만 아니라 주기적인 글로벌 마케팅 및 세일즈 회의 멤버인 다른 나라의 동료들에게도 이메일을 보냈다.

그랬더니 일본, 홍콩, 대만, 영국 등에서 다양한 답장이 쏟아졌다. ‘우리도 유사한 행사를 했는데 고객은 몇명 정도 초대하는 것이 좋다’, ‘요즘 중국과 인도 시장에 대해 관심이 많으니 참고해서 주제를 정하라’, ‘발표는 어떤 펀드매니저가 잘하더라’, 심지어 ‘기념품은 뭐가 좋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런 피드백에 따라 프로젝트의 콘셉트를 분명하게 하고 요약본을 수정하고 다시 공유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도 중간중간 계속 그 경과를 공유했다.

이렇게 이해관계자들 모두가 같은 인식을 갖고 한 방향을 바라보도록 조율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방식은 다같이 한걸음씩 가는 것이어서 우리가 느끼기에는 갑갑할 정도로 느린 면도 있다. 그러나 여러 나라의 활동을 통합해 관리하면서 글로벌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는 다국적 기업으로서는 꼭 필요한 방식이다.

피드백을 성실하게 보내는 것도 일종의 의무다. 이메일에 참조된 직속상사들이 어떤 피드백이 오가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자기 일만 열심히 하는 모습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성실하게 의견을 담아 답장을 보내는 것이 전체 조직에 기여하는 팀워크가 있는 것으로 좋은 평가를 받게 된다. 이것이 글로벌 네트워크의 가치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장점 때문에 글로벌 기업들은 대부분 여러 나라에서 유사한 일을 하는 부서들끼리 묶어서 관리하는 매트릭스 조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런 방식은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업무에도 적용된다. 주변 동료나 상사와 “내가 이런 일을 하고 있고, 저런 일을 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와 같은 대화를 자주 해야 한다. 이렇게 혹시 내가 놓친 부분이 없는지 파악하고 보완해 가면서 일해야 한다. 내가 생각이 부족했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화를 통해 발견하고 예방할 수 있었는데 혼자 진행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큰일이다.

일하는 방식은 다양하고 장단점이 있다. 한가지 방식이 정답은 아니다. 한국 경험이 좀 있는 외국인들은 오히려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에 적응하고 그 속도를 좋아하기도 한다. 그래도 외국인들과 함께 일하다 보면 글로벌 방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외국계 기업이 처음인 경우 영어보다는 일하는 방식이 낯설어 힘들어 하는 것을 많이 봤다. 더구나 우리나라 기업들도 이제는 일하는 문화가 점차 글로벌 스타일로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묵묵히 일하고 나중에 결과를 보여 주는 것을 ‘진국’이라고 부르며 미덕으로 여겨왔다. 자기가 하는 일을 떠들고 다니는 것은 눈총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외국계 기업에서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떠들고 다닐 필요가 있다.

■최기훈 이사 =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하나은행, 미래에셋증권, 피델리티자산운용, 신한BNP파리바자산운용, SC제일은행 등 금융권에서 30여 년을 근무하고 지금은 국내 최대 체험학습 플랫폼 아자스쿨에서 최고전략책임자(CSO)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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