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노인들이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무료급식소에서 줄을 서고 있다. 2026.7.31 © 뉴스1 윤지오 수습기자
31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무료 급식소에서 만난 이상맹 씨(89·남)는 내리쬐는 햇빛에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 씨는 무료 급식을 먹기 위해 지하철 왕십리역에서 매일 오전 5시 30분 첫차를 탄다고 했다. 이 씨는 "새벽같이 와서 식권 받는 사람들이 많다"며 "밥 먹고 나선 어디 갈 데가 없으니깐 그냥 탑골공원 그늘 밑에 가서 쉰다"고 말했다.
연일 살인적인 폭염이 계속되는 가운데, 탑골공원 일대의 노인들은 마땅히 쉴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해 7월 31일 종로구청이 탑골공원 일대 담벼락의 장기·바둑판을 철거한 후 노인들은 근처 맥도날드, 영화관, 지하철역 등으로 뿔뿔이 흩어진 모습이다.
첫 차 타고 무료급식 식권 받는 노인들…폭염에도 경로당 아닌 전철로 향한다
이날 오전 8시쯤 탑골공원 무료 급식소는 배식 30분 전부터 130여명의 노인이 담장에 나란히 기대앉아 아침 주먹밥 배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팔토시와 모자를 착용한 노인들이 연신 부채질하며 땀을 식혔다. 250개가량의 주먹밥 무료 배식은 15분 만에 동났다.
이곳의 노인들은 보통 첫차를 타고 새벽에 탑골공원에 도착해 오전 6시쯤 '허경영 하늘궁' 측의 도시락 수령용 번호표를 받는다. 오전 5시 30분엔 도착해야 번호표를 받을 수 있다는 게 노인들의 설명이다.
노인들은 이후 오전 7시쯤 조계종의 원각사 무료 급식소 점심 식권을 받는다. 오전 8시 30분에 원각사 무료 급식소에서 아침을 먹은 후, 오전 11시 30분에 다시 같은 무료 급식소에서 점심을 먹는다. 그러고 나서 저녁 식사는 하늘궁 측이 배부한 도시락으로 때운다.
밥을 먹기 위해선 탑골공원 일대에서 오전을 보내야 하는 셈이다. 폭염에도 탑골공원 내 그늘 밑에서 노인들이 몰려있는 이유다. 올해 2월부터 무료 급식을 먹었다는 이 모 씨(78·남)는 "낮 동안엔 덥지만, 공원 그늘에 있는다"며 "공원에서 주는 밥으로 아침, 점심, 저녁을 다 먹는데 서울역에서도 밥을 주는 곳이 있어서 거기에 가는 노인들도 있다"고 설명했다.
더위를 못 견딜 정도로 힘들면 노인들은 전철역에 가서 더위를 식힌다. 혼자 마포구 성산동에 거주하는 박재균 씨(92·남)는 "나이가 많으니까 어디 갈 데가 없고, 너무 더울 땐 3호선이나 5호선 지하철로 간다"며 "고등교육 받고 직장생활 34년 했는데, 이제 나이 들어서 놀아주는 사람도 없고 기력도 없다"고 말했다.
노인들은 아무리 더워도 복지관과 경로당은 가기 꺼려진다고 했다. 평소 복지관과 경로당이 회원제로 운영되는 데다가, 자주 방문한 주민들끼리 이미 친해서 이용하기가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박 씨는 "복지관·경로당이 안 받아주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거기 가서 놀지를 못한다"며 "경로당이 시설은 잘돼 있지만 안에서 같이 놀려고 박자도 맞춰야 하는데, 눈도 어둡고 귀도 울려서 잘 안 들리고 힘들다. 노인네들이 할 게 없다"고 했다.
하루 종일 바깥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만큼 노인들은 폭염에 지친 모습이었다. 인천에서 첫 차를 타고 왔다는 70대 김일호 씨는 "지난번에 하늘궁 도시락을 받던 사람이 한 명 쓰러지기도 했다"며 "바람 안 불면 공원 안이 더워서 말도 못 할 정도"라고 했다.
31일 노인들이 서울 종로구 허리우드 극장에서 영화 상영을 기다리고 있다. 2026.7.31 © 뉴스1 윤지오 수습기자
장기판 없어진 탑골공원, 뿔뿔이 흩어진 노인들…맥도날드·영화관 등으로
노인들은 탑골공원 내 바둑·장기판이 사라진 후에 모두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으로 더위를 피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 씨는 "옛날엔 공원에서 다 같이 바둑, 장기라도 뒀는데 이젠 다 쫓겨나서 인근 무료 급식소나 지하철 등 다 다른 데로 넘어간다"며 "노인네들이 할 일이 뭐 있겠냐. 나도 명동 성당에 가서 급식을 먹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탑골공원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있는 맥도날드 종로3가점은 대다수 손님이 노인들이었다. 이곳의 남성 노인들은 주로 콜라·냉커피·치킨 텐더 등을 시켜 먹으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노인들이 시킨 음료들은 시간이 오래 지난 듯 얼음이 녹아 있었다.
매장 2층에서 콜라를 먹고 있던 70대 김 모 씨는 "콜라 한 잔 시키고 2시간 정돈 있어도 된다. 그 이후에 또 콜라 시키고 하루 종일 있는다"며 "오래 있어도 직원들이 별말 안 한다"고 말했다.
낙원악기상가에 위치한 '허리우드 극장'(실버영화관)도 더위를 피하러 온 노인들로 북적였다. 허리우드 실버 극장은 사회적 기업 '추억을 파는 극장'이 운영하는 곳으로, 60세 이상은 2000원, 학생·청소년은 5000원, 일반 성인은 7000원에 영화를 관람할 수 있다.
오전 10시 30분 상영되는 영화 '애심'을 보러 온 김철민 씨(73·남)는 "여긴 에어컨도 계속 틀어주고 싸기도 해서 시간 때우려고 많이 온다"고 말했다. 박 모 씨(76·남)는 "영화 보러 들어가서 재미없으면 잠도 자고 쉬었다가 나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기존의 복지시설이 노인들의 생활 방식과 맞지 않아 정작 노인들이 폭염·한파에 찾아가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구혜영 한양사이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탑골공원을 찾는 분들은 한정된 공간 내에서 정형화된 프로그램을 수행하거나, 센터 내부의 문화를 불편해하는 경향이 있다"며 "오히려 탑골공원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이 이들이 탑골공원을 선택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구 교수는 "노인들이 폭염·한파를 피하기 위해선 넓은 체육관 같은 쉼터 공간이 필요하다"며 "자유롭게 사람을 기다리기도 하고, 시간을 보내며 대화를 나누거나 가끔씩 먹을 것도 먹는 공간이 노인들에게 맞다"고 했다.
허준수 숭실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폭염 시 탑골공원을 수시로 순찰하면서 쿨링센터나 노인복지 관련 시설로 이동할 수 있게 유도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31일 노인들이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담장에 앉아 더위를 식히고 있다. 2026.7.31 © 뉴스1 윤지오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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