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원해줄게" 의사들 뒤통수 친 1970억 사기[돈분쟁해결소]

사회

이데일리,

2026년 8월 11일, 오후 01:58

경제뉴스 속 사건들은 남의 이야기 같지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돈분쟁해결소’는 실제 피해 사례들을 재구성한 사건을 통해 ‘내가 당사자라면?’이라는 질문에 답하며 돈을 둘러싼 법적 쟁점과 현실적인 대응법을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

개원 브로커의 '잔고 찍기' 수법에 연루돼 의사 면허 취소 위기에 처한 A씨가 변호사의 상담을 받고 있다.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개원 브로커의 '잔고 찍기' 수법에 연루돼 의사 면허 취소 위기에 처한 A씨가 변호사의 상담을 받고 있다. 생성형 AI로 만든 이미지.
[법무법인 한중 박기태 변호사]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개원을 준비하던 30대 의사 A씨. 병원 자리를 알아보던 중 개원 세미나에서 만난 컨설팅 업체 대표가 자금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신용보증기금의 ‘예비창업보증’으로 고액 대출을 받으려면 수억 원의 자기자본을 증명해야 하는데, 갓 수련을 마친 A씨의 통장은 비어 있었습니다. 대표는 “의료인 상당수가 이렇게 개원 자금을 마련한다. 업계에서 다 아는 방법”이라며 “수억 원을 잠깐 입금해줄 테니 그 순간의 잔고증명서를 떼어 내면 된다”고 했습니다. A씨는 그 말대로 보증서를 받아 대출을 실행한 후 빌린 돈을 돌려주며 수수료를 지급했습니다.

문제는 몇 달 뒤였습니다. 수사가 시작됐다는 소식이 돌자 대표는 “정상 거래로 위장해야 하니 대출금을 보내라”고 했고 겁이 난 A씨는 수억 원을 송금했습니다. 그 돈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A씨는 경찰서에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피의자로 출석하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지난 7월 검찰은 이런 수법으로 신용보증기금 보증서 약 1970억 원을 편취한 개원 브로커를 구속기소했다고 밝혔습니다. 브로커에게 이용당한 의사·약사가 수백 명에 이릅니다.

-통장에 실제로 돈이 들어와 있었고, 그 잔고증명서는 진짜입니다. 그래도 사기인가요.

△그렇습니다. 사기죄의 핵심은 상대방을 속여 재산상 이익을 얻는 것입니다. 심사 기준인 자기자본은 내 돈을 말합니다. 잠깐 빌려 채운 잔고는 자기자본이 아니고 그 증명서를 내 보증기관을 속였다면 서류 속 숫자가 실재했더라도 기망이 됩니다. 금융권에서 ‘잔고 찍기’라 불리는 이 방식은 법적으로 허위 서류를 이용한 사기입니다. 더 무거운 문제는 액수입니다. 편취액이 5억원을 넘으면 형법상 사기가 아니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이 적용돼 법정형이 징역 3년 이상으로 뜁니다. 고액 보증은 대부분 이 선을 넘습니다.

-저는 불법인 줄 정말 몰랐습니다. 브로커가 합법적인 관행이라고 했으니까요. 그래도 처벌받나요.

△바로 그 지점이 사건의 갈림길입니다. 사기죄는 고의범이라 서류가 허위인 줄 알면서 이용했는지가 유무죄를 가릅니다. 다만 ‘몰랐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수사기관은 조금만 주의했다면 알 수 있지 않았느냐고 따져 물을 것입니다. 결국 객관적 자료로 소명해야 합니다. 브로커를 알게 된 경위, 합법이라고 설명한 카카오톡·문자 기록, 정상적인 컨설팅 계약서와 수수료 내역, 그리고 대출금을 실제 개원에 썼다는 증빙이 핵심입니다. 반대로 대출금을 개원이 아니라 아파트 구입 등에 썼다면 사정은 몹시 불리해집니다.

-조사를 앞두고 브로커 측에서 ‘함께 대응하자’며 변호사를 소개해주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응해도 될까요.

△절대 안 됩니다. 수사가 시작되는 순간 브로커와 이용당한 사람의 이해관계는 정반대가 됩니다. 브로커는 ‘의사도 알고 있었다’고 해야 형이 줄고, A씨는 몰랐다는 것을 입증해야 삽니다. 같은 변호사를 쓰거나 공동 대응을 하면 이 핵심 방어 논리를 펼 수 없습니다. 추가로 돈을 보내라는 요구에 응하는 것도 가담을 인정하는 근거가 될 뿐입니다. 오히려 브로커를 사기로 고소하고 수사에 적극 협조하는 것이 자신이 피해자임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행동입니다. 실제로 이 사건의 브로커는 결국 구속기소됐습니다.

-만약 유죄가 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면허는 지킬 수 있나요.

△처벌보다 무서운 것이 면허입니다. 2023년 개정 의료법은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되면 집행유예라도 의사 면허를 자동으로 취소합니다.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같은, 흔히 선처라 불리는 판결로도 면허는 사라집니다. 그래서 실무의 현실적 목표는 재판에서 다투는 것보다 검찰 단계에서 기소유예를 받는 것입니다. 기소유예는 혐의는 인정되지만 여러 사정을 고려해 재판에 넘기지 않는 처분이라 전과가 남지 않고 면허도 지킬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번 사건에서 검찰은 브로커에게 이용당한 정황, 피해 변제 노력 등을 고려해 의사·약사 276명 중 273명을 기소유예했습니다. 수사 초기에 소명 자료를 얼마나 체계적으로 내느냐가 이 결과를 가릅니다. 다만 형사처벌을 면해도 대출금을 갚을 책임은 남습니다. 브로커에게 뜯긴 돈까지 감당하기 어렵다면 회생·파산 등 채무조정 절차를 함께 검토해야 합니다.

담보 없는 이를 돕겠다는 신용보증기금이 정작 고액 보증에 자기자본 증명을 요구한 모순이 이 편법의 토양이 됐습니다. 서류만 훑는 형식 심사는 위조를 2년 넘게 통과시켰고, 신용보증기금은 사건 뒤에야 한도를 줄이고 심사를 조였습니다. 제도가 남긴 숙제입니다. 그리고 개원을 앞둔 분들께 당부합니다. “다들 이렇게 한다”는 말로 시작되는 금융 컨설팅은 그 자체가 경고음입니다. 서류에 이름을 얹기 전에 그 서류가 진실인지부터 물어야 합니다.

법무법인 한중 박기태 변호사. (사진=이데일리 DB)
법무법인 한중 박기태 변호사. (사진=이데일리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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