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 폭로 후 휘두른 폭력에 칼 든 조카, 정당행위"…대법 유죄 파기

사회

이데일리,

2026년 8월 12일, 오전 08:18

[이데일리 백주아 기자] 어린 시절 자신을 성추행한 사실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집까지 찾아와 폭행하고 가위로 위협한 삼촌에 맞서 부엌칼을 들고 대치한 조카를 특수협박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은 흉기를 든 순간의 행위만 떼어 판단할 것이 아니라 다툼이 시작된 경위와 가해·피해의 선후 및 정도, 당사자 간 역학관계 등 일련의 구체적인 상황을 종합해 위법성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봤다.

(사진=챗GPT)
(사진=챗GPT)
12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특수협박 혐의로 기소된 박모씨에게 벌금 300만원의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인천지법으로 돌려보냈다.

박씨는 피해자인 70대 삼촌 A씨의 조카로 평소 왕래하던 사이였다. 박씨는 어린 시절 A씨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사실이 있다고 가족들에게 폭로했고, 이에 격분한 A씨는 박씨의 집으로 찾아가 박씨가 퇴근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A씨는 박씨가 귀가해 현관문을 열자마자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 박씨 역시 이에 대항해 A씨의 얼굴을 때리고 멱살을 잡는 등 몸싸움을 벌였다.

박씨와 함께 살던 이모가 싸움을 말리면서 두 사람은 잠시 떨어졌지만 다툼은 끝나지 않았다. A씨는 거실 서랍장의 서랍 2개를 박씨에게 던졌고, 이 가운데 하나가 박씨의 오른쪽 엄지손가락에 맞았다. 박씨는 이로 인해 약 3주간 치료가 필요한 손가락 염좌와 긴장 등의 상해를 입었다.

A씨는 이후 다시 오른 주먹으로 박씨의 얼굴을 세 차례 때린 뒤 식탁 위에 있던 날 길이 약 14㎝의 가위를 가져왔다. 그는 가위 날 끝을 손으로 치면서 “나는 살 만큼 살았으니까 너 죽이고 나 죽으면 된다”는 취지로 박씨를 위협했다.

이에 박씨 역시 싱크대 위에 있던 날 길이 약 25㎝의 부엌칼을 가져와 “죽고 싶으면 너나 죽어, 죽고 싶으면 와 봐라”라고 말하며 A씨와 대치했다. 검찰은 이 같은 박씨의 발언과 행동이 특수협박에 해당한다고 보고 재판에 넘겼다.

대치 과정에서 112에 신고한 사람은 박씨였다. 이후 A씨가 가위를 바닥에 내려놓았지만 박씨는 경찰관이 도착할 때까지 칼을 든 채 부엌에 있었다. 다만 박씨가 이후 A씨를 향해 추가로 위해를 가하거나 위협한 행동은 없었다.

1심은 박씨의 특수협박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항소심 역시 박씨 측의 정당방위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112 신고 이후 A씨가 가위를 내려놓았는데도 박씨가 계속 칼을 든 채 서 있었던 점과 당시 A씨가 행사한 유형력의 정도가 박씨의 행동의 자유를 억압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고려했다.

항소심은 이를 토대로 박씨가 선택한 대응 수단이나 방법에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정당방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다만 “피고인이 이 사건 범행에 이르게 된 경위에 다소 참작할 부분이 있다”며 박씨의 양형부당 주장을 받아들여 1심을 파기하고 벌금 300만원에 대한 집행을 1년간 유예했다.

그러나 대법원 판단은 달랐다.

특히 대법원은 1·2심에서 주로 다뤄졌던 형법 제21조의 ‘정당방위’가 아니라 형법 제20조가 규정한 ‘정당행위’에 해당할 가능성에 주목했다.

형법 제20조는 법령에 따른 행위나 업무로 인한 행위, 그 밖에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행위는 처벌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판례는 정당행위 여부를 판단할 때 행위의 목적·동기의 정당성, 수단·방법의 상당성, 보호법익과 침해법익 사이의 균형성, 긴급성, 다른 수단이나 방법이 없었다는 보충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

대법원은 이번 사건에서 다툼의 발단과 경위에 비춰 A씨의 책임이 근원적이고 더 무겁다고 판단했다.

A씨가 박씨의 집에 예고 없이 찾아와 기다리다가 귀가한 박씨를 먼저 폭행했고, 이모의 제지로 몸싸움이 잠시 중단된 뒤에도 서랍을 던지고 다시 주먹으로 얼굴을 때린 데 이어 가위를 들어 “너 죽이고 나 죽으면 된다”는 취지로 협박했다는 점을 중요하게 봤다.

반면 박씨의 대응 정도는 상대적으로 가벼웠고, 실제 피해 역시 박씨가 더 크게 입었다고 판단했다. 박씨가 직접 112에 신고했고 A씨가 가위를 내려놓은 이후에는 칼을 들고 경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을 뿐 추가적인 위협 행위가 없었다는 점도 고려됐다.

대법원은 이런 사정을 종합하면 박씨가 부엌칼을 든 행위는 예고 없이 집으로 찾아와 폭력을 행사하고 나아가 가위로 생명·신체에 위해를 가하겠다고 협박하는 A씨의 계속되는 부당한 공격에 맞서 이뤄진 수동적·소극적인 대응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박씨의 행동은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정당행위로 평가될 여지가 크다고 봤다.

대법원은 그럼에도 박씨의 행위를 유죄로 판단한 원심에는 위법성조각사유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있다며 사건을 다시 심리하도록 인천지법에 돌려보냈다.

이번 판결은 가정 내 상호 폭력 상황에서 처음 피해를 입은 사람이 방어 목적으로 흉기를 든 경우 흉기를 사용했다는 특정 순간만을 따로 떼어 위법성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다.

대법원 관계자는 “애초 피해자였던 사람이 방어적으로 흉기를 든 경우 그 순간의 행위만 따로 떼어 평가할 것이 아니라 그 행위에 이르게 된 구체적인 상황과 다툼의 경위, 가해·피해의 선후와 정도, 당사자 사이 힘의 불균형 등 역학관계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정당행위 성립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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