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아우 하던 다정한 마을"…철거 앞둔 '마지막 달동네' 정릉골

사회

뉴스1,

2026년 8월 13일, 오전 07:00

10일 서울 성북구 정릉골의 한 집에 '새들은 여전히 이곳에서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한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2026.8.10 ©뉴스1 한수민 수습기자
"여기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 형, 아우 할 만큼 서로 친하게 지냈어. 이제는 다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졌고."
북한산 자락에 자리 잡은 서울 성북구의 달동네 정릉골. 이곳에서 19년간 산 김우권 정릉골 세입자대책위원회장은 이웃끼리 살뜰히 서로를 돌봐줬던 '다정한 마을'이었다고 회상했다. 정릉골은 2024년 1월 주택재개발 관리처분 인가로 이주가 시작돼 지금은 오가는 사람 없이 고요했다.

정릉골은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다. 1960~1970년대 청계천과 북아현동 판자촌 철거로 집을 잃은 사람들이 정착해 살며 형성된 마을로, 소설 '토지'를 쓴 박경리 작가가 생전 머물렀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정릉골은 한 때 1200여 가구가 모여 살 정도로 주택이 밀집한 곳이었다.

하지만 지난 10일 취재진이 찾은 정릉골은 매미 소리만 크게 울려 퍼질 만큼 한산했다. 정릉골은 2024년 1월 주택재개발 관리처분인가 이후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돼, 곧 철거를 앞두고 있다. 아직도 정릉골에 남아있는 주민은 3~4가구에 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릉골 달동네 자리에는 1411세대 규모의 타운하우스가 들어설 예정이다.

정릉골 언덕을 내려가면 주민들이 떠나간 빈집이 이어졌다. 대문엔 출입금지 스티커가 붙어 있고, 담벼락 곳곳에 빨간 스프레이로 '철거'라 쓰여 있었다. 골목길 곳곳 주민들이 버리고 간 가전과 집기, 생활쓰레기가 쌓인 쓰레기 더미가 보였다. 정릉골을 오가는 사람들은 버스 기사와 등산객 정도가 다였다.

'새들은 여전히 이곳에서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한다', '꿈꾸는 삶이 여기에' 등 철거에 반대했던 주민과 연대자들의 투쟁의 흔적도 정릉골에 남아 있었다. 지난 6월 강제집행 과정에서 용역업체 직원들과 물리적 충돌이 있었을 때 옥바라지선교센터 등 연대자 100여명이 정릉골을 찾아 마을 곳곳에 그림을 그린 흔적이었다.

성북구 마을버스를 8개월간 운행했다는 버스 기사 허인일(45·남) 씨는 "버스에 정릉골 마을 주민들이 하나둘 사라지더니 이제 정릉골로 향하는 주민은 3~4명 남짓"이라며 "정릉골엔 쓰레기 더미뿐"이라 말했다.

10일 서울 성북구 정릉골의 마을버스 정류장 모습. 2026.8.10 ©뉴스1 한수민 수습기자

정릉골 주민들은 이주로 인해 뿔뿔이 흩어졌다. 김 위원장은 "임대주택 대상자들은 노원이나 길음 등 이곳저곳으로 갔고, 비대상자들은 각자 흩어졌다"고 했다.

주민들은 정릉골을 '끝까지 지켜내고 싶었던 삶의 터전'이자, 다시 오고 싶은 그리운 곳으로 기억했다.

지난 2024년부터 정릉골 일대에서 활동한 신희철 노동당 성북지역 위원장은 정릉골이 도심에선 찾아보기 힘든 정과 멋스러움이 느껴지는 동네였다고 설명했다. 신 위원장은 "이웃끼리 아침에 안부 인사를 나누며 서로 챙겨줬던 곳"이라며 "주민들이 정성스레 가꾼 텃밭이 보여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신 위원장은 "2024년 인가 이후 마을 주민들은 강제집행에 대한 불안으로 마음을 졸였다"며 "특히 올해 명절엔 주민들이 집을 비운 사이 조합이 강제집행을 할까 두려워 시장에도 가지 못하고 꼼짝없이 집을 지켰다"고 전했다.

김 위원장은 "정릉골을 떠나 임대주택에 입주한 주민들도 처음엔 편하고 좋다고 말하지만 결국 정릉골이 그립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며 "임대주택에 못 들어간 이들도 오래 살던 곳이 좋다며 정릉시장 인근 반지하 쪽으로 이사를 갔다"고 말했다.

이주와 함께 곧 폐업할 예정인 가게들에도 '다시 인사할 날이 왔으면 좋겠다'며 아쉬움이 묻어난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정릉시장에서 50여년간 가게를 운영한 최명희 씨(63·여)는 "나도 여기 토박이인데, 아들 친구부터 지인들까지 싹 다 이사갔다"고 말했다.

10일 서울 성북구 정릉골의 한 가게에 폐업을 알리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 2026.8.10 ©뉴스1 한수민 수습기자

현재 정릉골에 남아있는 주민들도 최근 이주에 합의해 이달 말까지 모두 정릉골을 떠날 예정이지만, 아직 살 곳을 찾지 못한 이들도 있다. 주거 이전비나 재개발 임대주택을 신청할 수 없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현행법에 따라 정비구역 지정을 위한 공람 공고일 3달 전을 기준으로 그 전부터 살아온 세입자들이 임대주택 대상자가 된다. 그런데 정릉골은 공람 공고일이 2009년 9월 30일로, 약 17년 전이라 요건을 맞출 수 있는 대상자가 별로 없다.

이원호 빈곤사회연대 활동가는 "주거 이전비·임대주택을 지원받을 수 없는 세입자가 전체의 60~70%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한다"고 설명했다.

임대주택 대상자가 아닌 정릉골 주민 박수영(63·남) 씨는 "아직 살 집을 찾지 못했다"며 "여기 남아있는 다른 주민들도 상황이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가진 돈으로는 이 주변에서 갈 수 있는 곳이 없다"며 "고시원 같은 곳을 알아보고 있다"고 한탄했다.

한편 정릉골이 사라지면 사실상 서울의 달동네는 모두 없어지게 된다. 정릉골과 함께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불리던 노원구 백사마을은 지난 5월 철거를 시작했으며 12월 철거를 마칠 예정이다.

10일 서울 성북구 정릉골 담벼락에 '철거'라고 적혀 있다. 2026.8.10 ©뉴스1 한수민 수습기자


sinjenny97@news1.kr

추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