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AI 범죄의 시대, 둑은 넘치기 전에 쌓아야 한다

사회

뉴스1,

2026년 8월 18일, 오전 07:00

© 뉴스1 김초희 디자이너

보이스피싱 한 통을 떠올려 보자. 몇 해 전만 해도 어색한 억양과 말투가 단서였다. 지금은 다르다. 단 몇 초 분량의 음성만 있으면 가족의 목소리가 실제와 구별하기 어렵게 복제된다. "엄마, 나 사고 났어"라는 전화가 진짜 자녀의 목소리로 걸려 온다면, 그 짧은 순간에 그 목소리를 의심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인공지능(AI)이 바꾼 것은 범죄의 종류가 아니다. 범죄의 비용이다. 과거의 사기 범죄는 사람과 시간을 갈아 넣는 일이었다. 한 사람을 정교하게 속이려면 공을 들여야 했고, 많은 사람을 노리려면 정밀함을 포기해야 했다. 규모와 정밀함은 맞바꿔야 하는 것이었다. AI는 이 오래된 맞교환을 깨뜨렸다. 이제는 수만 명에게 각자의 상황에 맞춘 미끼 문자나 전화를 거의 공짜로 동시에 던질 수 있다. 각본을 짜고, 표적을 고르고, 목소리와 얼굴을 만드는 일이 모두 AI 기술로 자동화되고 있다. 진입 비용이 무너지면 그 일을 시도하는 사람도 늘어난다.

숫자는 이미 이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2025년 보이스피싱 총 피해액은 사상 처음 1조 원을 넘었고, 기관을 사칭한 유형이 전체 피해의 약 77%를 차지했다. 딥페이크 성범죄 피해는 2024년 한 해에만 세 배 넘게 늘었고, 그 피해자 열에 아홉이 10대와 20대였다. 선거관리위원회에 접수된 딥페이크 영상 삭제 요청은 2024년 총선 388건에서 2025년 대선 1만 510건으로 뛰었다. 발생 건수가 줄어든 해에도 1인당 피해액은 오히려 늘었다. 더 적은 인력으로도 더 큰 피해를 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우려하는 것은 통계에 잡힌 숫자가 아니라, 아직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은 부분이다. 첫째, 범죄와 대응의 시차다. AI로 자동화된 범죄는 서서히 늘지 않고 어느 순간 한꺼번에 쏟아지게 될 것이다. 신고가 들어오고 사건이 분류되어야 비로소 통계가 잡히니, 지금 보는 숫자는 이미 지나간 파도일 수 있다. 둘째, 입증의 어려움이다. 무엇이든 조작되는 세상에서는 진짜 증거마저 의심받는다. 명백한 영상 앞에서 "이것도 딥페이크 아니냐"고 발뺌하는 순간, 입증의 무게는 거꾸로 피해자에게 넘어간다. 이것은 범죄 한 건의 문제를 넘어, 사회가 무엇을 믿을 수 있는가의 문제로 번진다. 마지막은 비용의 비대칭이다. 공격하는 쪽의 비용은 0에 가깝게 무너졌지만, 막는 쪽의 비용은 그대로다. 범죄자는 코드 한 줄로 수만 건을 복제하는데, 수사는 사건마다 많은 인력과 시간을 투입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나. 탐지 기술 하나로 범죄를 이긴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위조와 탐지는 끝없는 군비경쟁과 같기 때문에 기술은 필요하지만 언제나 충분하지 않다. 대신 이 비대칭적인 상황을 되돌려야 한다. 공격 비용이 싸졌다면, 방어는 그 공격을 다시 비싸게 만드는 쪽이어야 한다. 범행의 길목마다 장애물을 촘촘히 설치해야 한다. 대량 문자와 가짜 발신번호를 통신망에서 먼저 거르고, 딥페이크 영상은 플랫폼이 신속히 찾아 지우게 하고, 의심스러운 자금은 금융권에서 곧바로 묶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장애물이 하나씩 쌓일수록 한 번에 수만 명을 노리던 범행도 다시 손이 많이 가게 되고,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이 된다.

이미 효과가 확인된 길이다. 지난해 출범한 경찰청 보이스피싱 통합대응단은 흩어진 대응을 모으고, 의심 번호를 10분 안에 차단하는 체계를 갖췄다. 그 결과 반년 만에 보이스피싱 발생을 약 31%, 피해액을 약 26% 줄였다. 새 기술이 아니라 대응 구조를 바꿔 거둔 성과다. 범죄가 자동화로 빨라진다면, 대응방식도 그에 맞게 바꿔 따라잡을 수 있다.

법의 공백도 메워야 한다. 내 얼굴과 목소리를 지키는 권리를 새로 규정하더라도, 정작 가짜가 올라온 사이트가 해외에 있고 삭제를 강제할 길이 없으면 권리는 종이 위에만 남는다. 피해자와 수사기관이 신고하면 곧바로 지우고, 응하지 않는 플랫폼에는 실질적 책임을 묻는 절차까지 갖춰야 권리가 비로소 작동한다.

마지막은 시민의 회복력이다. 의심스러운 전화에 그 사람만 아는 것을 되물어 보는 습관, 한 번 더 확인하는 여유가 가장 현실적인 방어선이 된다. 다만 개인의 경계만으로는 부족하다. 앞서 말한 입증의 어려움, 곧 진짜마저 가짜로 의심받는 문제는 한 사람의 분별로는 모든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모든 것을 의심하며 살 수 없는 이상, 무엇을 어떻게 믿을지는 사회가 함께 다시 정해야 할 약속이다.

좋은 대책이 아무리 많아도 순서가 있다. 지금의 급선무는 분명하다. 공격의 비용은 이미 무너졌지만, 방어의 둑을 쌓을 시간은 아직 남아 있다. 거대한 파도는 아직 오지 않았고, 둑은 물이 넘친 뒤가 아니라 그 전에 쌓는 것이다. 현장에서 사건을 마주해 왔고 지금은 그 대응의 구조를 만드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지금이 그때라고 믿는다.

이치화 경찰청 인공지능정책계장/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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