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박한 상태를 이용하여'…한글날 100주년 판결문 곳곳 일본식 한자어

사회

뉴스1,

2026년 October 09일, AM 07:00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모습. 2026.3.12 © 뉴스1 이호윤 기자
일응 이 사건의 존재도 알 수 있었다고 보이기는 하나 피해자의 궁박, 경솔 또는 무경험을 이용하여…"
한글날 제정 100주년을 맞이했지만, 법원 판결문에는 궁박(窮迫), 기왕증(旣往症), 해태(懈怠), 일응(一應) 등 일본식 한자어가 여전히 많아 당사자들의 이해가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법원에서는 '쉬운 법률용어 사전'을 제작하고 쉬운 판결문을 작성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명확한 판결을 위해서는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피해 대체 표현을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9일 법조계에 따르면 법원행정처는 지난해 10월 정책연구용역 결과에 따라 '쉬운 법률용어 사전'을 제작했다.

이 사전은 법률용어 이해에 어려움을 겪는 발달장애인이나 어린이 등 정보 약자를 위해 제작됐다.

법률용어의 기본적인 의미를 중심으로 이해하기 쉽게 풀어낸 글과 그림 자료 등으로 구성돼 있다. 사전에서는 '무효'에 대해 '했던 약속이나 행동을 없던 일로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위계'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하거나 잘못된 정부를 주어 다른 사람이 잘못 판단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소개한다.

반면 판결문에는 여전히 해독이 어려운 단어들이 다수 사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몹시 곤궁한 상태'를 뜻하는 '궁박' △'과거에 앓았거나 현재 앓고 있는 질병 또는 상해'를 뜻하는 '기왕증' △'어떤 법률 행위를 할 기일을 이유 없이 넘겨 책임을 다하지 아니하는 일'을 뜻하는 '해태' △'일단, 우선'이라는 의미를 지닌 '일응'이 있다.

법률 전문가들은 이러한 표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당사자들은 여전히 읽는 것 자체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최근 지방법원에서 보증금 반환 소송의 1심 판결문을 받아 본 A 씨는 "주장한 쟁점에 대해 재판부에서 꼼꼼하게 살펴봐 준 것 같지만, 판결문을 이해하기 어려워서 읽는 데만 오랜 시간이 걸렸다"며 "법률용어들은 결국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법원에서도 일반 당사자를 위한 '쉬운 판결문' 작성 노력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2월 서울북부지법에서는 이른바 '나 홀로 소송'을 진행한 피고 B 씨를 위해 'B 씨가 주로 다투고 있는 쟁점에 대한 보다 쉬운 설명'을 추가한 판결이 나왔다.

해당 판결에서는 "종전 집주인에게 보증금 반환 채권이 양도됐다는 사실이 통지되면 그때부터는 종전 집주인은 그 해당 금액에 대해선 더 이상 세입자에게 반환해 봐야 보증금 채권을 양수한 사람에게는 그러한 사정이 더 이상 먹히지 않게 됩니다"라며 일반 시민인 B 씨의 관점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였다.

아울러 '한국형 사회법원' 모델을 추진 중인 서울행정법원에서는 구청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한 지적 장애인이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구성된 이해하기 쉬운(이지리드·Easy-Read) 판결문이 나오기도 했다.

이지리드란 간단한 글과 보조 삽화를 통해 이해하기 쉽게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발달장애인이나 어린이, 고령자 등 기존 판결서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다.

지난달 대법원에서는 시청각장애인 4명이 CJ CGV, 롯데컬처웍스, 메가박스중앙 등을 상대로 제기한 차별 구제 청구 소송에서 이지리드 판결문을 일반 판결문과 함께 내놓기도 했다.

법원 안팎에서는 당사자가 이해하기 쉬운 판결문이 확대돼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수도권 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나 홀로 소송이 늘어나는 만큼, 특히 개인으로 소송에 참가하는 당사자를 위해서라면 어려운 법률용어나 일본어 표현보다는 쉬운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맞다"며 "사법 접근성을 확대하는 측면에서도 그러한 방향이 옳다"고 말했다.

다만 판결문의 특성상 명확한 표현과 판단이 가장 중요한 만큼, 다소 어려운 표현이더라도 법률용어 사용을 자제하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소송의 특성상 한쪽 당사자는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고, 다른 사건에서 판결문이 근거로 쓰일 수도 있어 여러 해석이 가능한 판결보다는 명확하고 오해하지 않을 판결이 중요하다"며 "현재 법률용어를 다른 쉬운 표현으로 대체하기 위해서는 많은 연구와 사회적인 합의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shha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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