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를 살해하고 아내를 납치한 혐의를 받는 20대 남성 A씨가 13일 오후 서울동부지방법원에서 열리는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2026.10.13 © 뉴스1 이종수 기자
올해 초 남양주 스토킹 살인사건에 이어 최근 서울과 제주에서도 관계성 범죄로 인한 참극이 잇따르면서 현행 피해자 보호 체계의 실효성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피해자들은 경찰에 신고하거나 접근금지·스마트워치 등 보호조치를 받았지만 끝내 범행을 피하지 못했다. 특히 서울 송파 사건에서는 접근금지 조치가 종료된 뒤 재신청 절차가 진행되는 사이 장모를 살해하고 아내를 납치해 도주했다가 검거됐다.
전문가들은 접근금지 조치의 연장 여부를 넘어 가해자의 접근 자체를 실질적으로 차단할 장치가 충분한지 따져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피해자의 신고와 가해자의 자발적인 준수에 의존하는 현행 보호 체계에서 벗어나 가해자와 피해자를 적극적으로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접근금지 끝나고 재신청했지만…그 사이 벌어진 비극
13일 경찰 등에 따르면 서울동부지법은 이날 오후 이혼 소송 중 장모를 살해하고 아내를 납치해 달아났다가 체포된 20대 김 모 씨에 대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진행했다. 김 씨는 존속살해와 특수감금 혐의를 받는다.
김 씨는 아내와 혼인무효 소송 중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파악됐다. 김 씨는 지난 8월 가정폭력 혐의로 입건돼 100m 이내 접근 및 전화·문자 등 전기통신을 이용한 접근 금지 조치를 받았다. 김 씨에게 내려진 접근 금지 조치는 지난달 30일 종료됐다. 경찰은 이달 6일 임시 조치 조치를 다시 신청했지만, 절차가 진행되는 사이 사건이 발생했다.
이와 관련해 경찰 관계자는 "피의자가 그동안 피해자를 찾아가거나 연락을 한 게 전혀 없어서 재신청을 고민했다"며 "그래도 혹시 모르니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해 임시 조치를 재신청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거듭되는 관계성 범죄에서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현재 시행되는 임시 조치들이 실질적으로 범행을 막을 수 있느냐는 점이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송파 사건에서) 접근 금지 기간이 끊기지 않고 만료 이전에 신청해서 계속 연장됐다고 한들 피해자를 지킬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점이 있다"고 말했다.
허 조사관은 스토킹 범죄의 경우 잠정조치 단계에서 위치추적 전자장치를 부착할 수 있지만 가정폭력 임시 조치에는 이 같은 제도가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접근금지 명령을 내려도 가해자가 이를 지키는지를 제대로 확인할 방법이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허 조사관은 "종이로만 접근 금지 명령을 내려도 가해자가 마음만 먹으면 다가갈 수 있다"며 "제대로 감시제도 자체가 없는 상황에서 재신청을 빨리해서 만료되고 안 되고는 여기서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허 조사관은 "이런 범죄에서 피해자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가해자랑 만나지 않는 것"이라며 "가해자를 잡아두거나 가해자를 잡아두지 않을 거면 전자발찌를 채워서 다가가는지 안 다가가는지를 감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마트워치 이용도 한계…"비상 상황 시 이용 어려워"
피해자에게 스마트워치를 지급하는 방식 역시 가해자가 이미 접근한 뒤 피해자가 직접 신고해야 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스마트워치는 위급 상황 시 긴급 버튼을 누르면 112 상황실이 자동으로 신고를 접수하며 실시간 위치 정보도 확인할 수 있다. 경찰은 현재 일주일에 한 번 피해자에게 연락해 스마트워치 사용 등을 확인하고 있다.
송파 사건에서 피해자는 스마트워치를 지급받았지만, 범행 당시 방전되어 있어 긴급 신고에 이용되지 못했다.
지난 12일 제주에서 스토킹하던 남성에게 살해된 40대 여성도 긴급 상황에서 스마트워치를 사용하지 못했다. 범행 시 가해자가 피해자가 차고 있던 스마트워치를 뜯어냈기 때문이다. 뜯어진 스마트 워치는 피해자의 주거지 인근에서 발견됐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경찰이 모든 스토킹 피해가 우려되는 여성들을 24시간 보호할 수는 없으니 여러 가지 제도적·기계적 도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면서도 "지금 시행하고 있는 것들은 피해자들에게 가해자를 피하라고 요구하는 것이고, 대표적인 게 스마트워치"라고 밝혔다.
이어 "스마트워치는 당황하면 누르지도 못하고, 눌러도 현장에 경찰이 오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며 "그 사이에 피해자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고 했다.
피해자 넘어 가족까지…지난해 주변인 피해 284건
관계성 범죄의 위험이 피해 당사자를 넘어 가족 등 주변인으로 확산한다는 점도 이번 사건에서 다시 드러났다.
한국여성의전화 분석 결과 지난해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게 살해된 여성은 최소 137명, 살인미수 등에서 살아남은 여성은 최소 252명으로 집계됐다.
자녀와 부모, 친구 등 주변인까지 포함하면 살해됐거나 살해될 위험에 처한 피해자는 최소 673명이었다. 이 가운데 주변인 피해는 284명으로 전체의 42.2%를 차지했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대표는 "너무나 오랫동안 관련 문제 제기를 계속해 왔는데, 똑같은 방식으로 사건이 일어나면서 목숨을 잃는 일들이 계속되는 것에 분노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송 대표는 "관계성 범죄는 주변인 피해를 분리해서 말하는 게 의미가 크지 않을 정도"라며 "가해자들은 피해자를 괴롭힐 목적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살해되거나 살해될 위험에 처한 피해자와 주변인 673명 가운데 86명(12.8%)은 경찰 신고나 피해자 보호조치 등을 통해 가해자와 분리를 시도하고 있던 상태였다.
"가해자 제재 없이는 피해자 보호 안 돼"
전문가들은 관계성 범죄에 대한 형사사법기관의 시각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교수는 "수사기관과, 특히 법원이 이런 사안을 다룰 때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가해자 중심에서만 생각한다"며 "피해자 입장에서 피해자를 중심으로, 피해자를 지향하는 형사정책이 돼야만 이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법원의 소극적인 판단뿐 아니라 경찰이 이미 마련된 강제조치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지도 따져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송 대표는 가정폭력 임시 조치와 스토킹 잠정조치에는 일정한 요건 아래 가해자를 유치장이나 구치소에 유치할 수 있는 수단이 이미 마련돼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송 대표는 "제도가 없는 게 아니라 있는 제도를 활용하지 않느냐가 질문이 돼야 한다"며 "일단은 경찰서로 이 사람을 데려가고 피해자가 안전대책을 마련할 수 있는 시공간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정폭력처벌법을 교제 폭력까지 포괄하는 형태로 개편하고 초동 조치 단계에서 '의무 체포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허 조사관은 "실효성 있는 조치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완벽한 분리"라며 "가해자를 구속하지 않는 한 피해자와 가해자를 완벽하게 분리할 수 있는 방법은 전자발찌를 채워서 접근하는지 여부를 감시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 번이라도 찾아오면 구속하는 등 강력하게 조치해야 하고, 한두 번 찾아올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며 "외국에서도 일단 체포하든가 풀어주는 경우에는 전자발찌를 채운다"고 했다.
허 조사관은 "가해자, 피해자 분리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한 피해자를 살릴 수 없다"고 강조했다.
sh@news1.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