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억분의 1' 갈무리. 재판매 및 DB 금지)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지 일에 몰두하면서 이직하고 돈 벌 궁리만 했다."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화제가 된 인생 시뮬레이션 게임 '80억분의 1'을 플레이한 한 이용자의 후기다. 무작위로 주어진 국가와 가정환경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는 게임이지만, 일부 이용자들은 수백억 원의 자산을 모은 경험을 자랑하거나 더 많은 재산을 축적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정작 이 게임에는 점수도, 순위도 없다. 제작자는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하는 기준을 의도적으로 배제했지만 일부 이용자들은 저마다 목표를 세우고 경제적·직업적 성공을 추구하고 있다.
21일 뉴스1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 5일 처음 공개된 '80억분의 1'은 전 세계 172개국의 통계를 바탕으로 가상의 인생을 살아보는 웹게임이다.
이용자는 태어날 국가와 가정환경을 직접 선택할 수 없으며, 무작위로 주어진 환경에서 학업과 취업, 투자, 결혼 등 삶의 갈림길마다 선택을 내린다. 한 번의 생애가 끝나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도 있다.
SNS에서는 게임을 반복하며 거액의 자산을 모으는 방법을 공유하는 글도 등장했다. 한 이용자는 "환생게임이 점점 재산 많이 모으기 게임으로 변질되는 게 웃기다"며 "결혼도 안 하고 107세까지 살면서 252억 원을 모았다"고 했다. 또 다른 이용자는 자산 1조 4695억 원을 모은 회사 대표가 되는 방법을 공유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유사한 인생 시뮬레이션 게임도 잇따라 등장했다. 국내 직장인으로 태어나 취업부터 퇴직까지 경험하는 '랜덤입사게임'을 비롯해 일본인의 삶이나 동물의 일생을 체험하는 게임까지 등장하는 등 소재도 다양해지고 있다.
인생 시뮬레이션 게임 '80억분의 1'에서 이용자가 화면을 좌우로 넘겨 선택지를 고르는 모습. 게임에서는 학업과 취업, 인간관계 등 삶의 갈림길마다 선택을 내릴 수 있으며 각 선택마다 '건강·행복·관계·돈' 항목의 점수가 반영된다. ('80억분의 1' 갈무리. 재판매 및 DB 금지)
게임을 약 15차례 플레이한 김지호 씨(29)는 출생환경보다 높은 사회적 계층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했다. 어떤 국가에서 태어나더라도 형편이 허락하는 한 건강검진과 운동, 자격증 취득, 직무교육 등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김 씨는 "현대를 사는 나 자신의 결핍인 것 같다"며 "자신이 못다 이룬 '또 다른 가능성'을 자식에게 요구하는 부모가 이런 기분인가 싶다"고 말했다. 이어 "30대를 앞두고 요구되는 시선들이 부담되고 스스로도 남들과 비교하게 되는 시기를 살고 있다"며 게임을 통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현재 생계를 위해 여러 일을 병행하고 있다는 김 씨는 게임 속에서 돈을 많이 벌고 나서야 인간관계와 휴식을 챙길 수 있었다며 "내가 원하는 삶 그 자체인 듯하다"고 했다.
제작자 "현실에서도 출생 국가 선택 못 해…각자 답 찾아가길"
반면 경제적 성공보다 인간관계와 삶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긴 이용자도 있었다. 소말리아에서 태어나 교사와 교장을 거쳐 83세에 생을 마감한 가상의 삶을 경험한 이 모 씨(28)는 "어떤 삶을 살더라도 결국 남는 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며 "가족과 지인의 경조사에는 최대한 돈을 아끼지 않으려고 했다"고 밝혔다.
게임 제작자 '진휘어스'(가명)는 뉴스1과의 인터뷰에서 이용자들이 경제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반복해서 게임을 하는 현상에 대해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현실에서도 많은 사람이 재산이나 직업으로 삶을 재어 본다"고 밝혔다.
다만 게임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도록 설계되지는 않았다. 출생 국가와 가정형편에 따른 교육·소득 등의 차이를 실제 통계에 맞춰 반영하고, 개인의 선택으로 삶을 바꿀 가능성에도 현실적인 제약을 뒀다는 게 제작자의 설명이다.
제작자는 "태어날 나라를 고르게 해 달라는 의견이 거의 매일 들어오지만 넣지 않았다"며 "우리 누구도 고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원하는 나라가 나올 때까지 다시 했다는 반응은 오히려 이 시뮬레이션이 보여주려던 것과 닿아 있다"며 "태어난 곳이 삶을 얼마나 크게 바꾸는지 알기 때문에 다시 누르는 거니까, 현실에서는 그 버튼이 없다"고 했다.
이용자의 선택에 따라 전개된 삶의 기록을 확인하는 화면. 출생부터 각 나이의 주요 사건과 선택 결과 등이 시간순으로 나타난다. ('80억분의 1' 갈무리. 재판매 및 DB 금지)
전문가는 가상의 인생에서도 현실에서 형성된 가치관과 성공에 대한 인식이 이어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김중백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는 소셜미디어에 과몰입된 삶을 살면서 하나 이상의 가치관과 자아를 자신도 모르게 가지며 살고 있다"며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목표를 가상현실에서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나 일종의 게임이기 때문에 여기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제작자는 "좋은 삶이 무엇인지는 제가 정하지 않는다"며 "삶의 마디마다 판단 대신 질문을 건네고, 그 답은 각자 찾아가게 두었다"고 말했다.
김 씨가 경험한 15차례의 인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도 꿈을 모두 이룬 삶은 아니었다. 일본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교사가 되지 못했고 의대 진학에도 실패했다. 이후 사무직으로 일하다 은퇴해 취미생활을 즐기며 102세에 생을 마감했다.
김 씨는 이 삶을 돌아보며 "꿈꾸는 대로 살진 못했으나 이렇게 쓰고 보니 괜찮은 삶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sby@news1.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