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고려아연 본사 모습. 2026.9.8 © 뉴스1 이종수 기자
영풍이 고려아연 자기주식 공개매수와 관련해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등 이사들을 상대로 낸 8000억 원대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패소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0부(부장판사 김석범)는 22일 영풍이 최 회장 등 고려아연 이사 10명을 상대로 낸 주주대표소송(손해배상)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재판부는 고려아연 이사들의 자기주식 취득 결정이 선관주의 의무를 위반했다고 보기 어렵고, 자기주식 취득 과정에도 법령 위반이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선관주의 의무는 이사가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검토하고 신중하게 경영상 판단을 내려야 할 의무를 가리킨다.
재판부는 이사의 경영상 판단에 재량권이 인정된다며 "회사의 최대 이익에 부합한다고 합리적으로 신뢰해 경영상 판단을 한 것이고, 그 내용이 현저히 불합리하지 않았다면 손해배상 책임을 부담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고려아연 이사들이 영풍 측의 공개매수를 회사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고, 외부 법률자문과 관련 가처분 사건의 법원 결정 등을 검토한 뒤 가격 조건과 자금 조달 방안 등을 고려해 공개매수를 결정한 것으로 봤다. 그러면서 "선관주의 의무 및 충실의무 위반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 자기주식 취득에 쓰인 고려아연의 재원이 위법하다는 영풍 측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풍은 고려아연이 특정 목적으로 한정된 임의준비금을 자기주식 취득에 쓴 게 상법 위반이며, 이를 주총 결의 없이 이사회 결의로 결정한 건 정관 위반이라는 입장이었다. 재판부는 이에 대해 "상법상 자기주식 취득가액 한도 규정은 취득할 수 있는 가액의 회계 관념상 총액 규모를 제한한 규정"이라며 영풍이 문제 삼은 임의준비금은 이 조항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영풍·MBK파트너스는 선고 후 입장문을 내고 "개인의 자리보전을 위해 고려아연을 사금고화하고 막대한 채무를 떠넘긴 위법적 경영 행위가 '이사의 재량'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며 "훼손된 주주가치와 파괴된 주주권리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 즉각 항소하겠다"고 했다.
고려아연은 "MBK와 영풍은 '적대적 인수·합병'을 위해 당사의 정상적 경영 활동을 방해하며 기업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물론 이사들의 경영 판단마저 위축시키는 협박성의 '묻지마식' 소송 남발을 이제는 멈춰야 한다"고 밝혔다.
이 소송은 영풍과 사모펀드 MBK파트너스가 지난 2024년 9월 고려아연 주식 공개매수를 시작한 뒤 고려아연이 이에 맞서 자기주식 공개매수에 나서면서 제기됐다. 고려아연 이사회가 주당 56만 원 수준이던 고려아연 주식을 89만 원에 204만 30주 공개매수하면서, 주당 가격 차이에 취득 주식 수를 곱한 금액만큼 고려아연에 손해를 끼쳤다는 게 영풍 측 주장이다. 이후 영풍은 같은 해 11월 최 회장 등 고려아연 이사 10명을 상대로 고려아연에 약 6732억 원을 배상하라는 주주대표소송(손해배상)을 제기했다.올해 4월 고려아연은 해당 소송의 청구액이 약 8369억 원으로 변경됐다고 공시했다. 주주대표소송은 회사가 이사의 책임을 추궁하는 소송을 제기하지 않을 경우 주주가 회사를 대신해 이사의 책임을 묻는 소송이다. 원고가 승소하면 배상금은 소송을 제기한 주주가 아닌 회사에 돌아간다. 고(故) 장병희·최기호 창업주가 공동으로 일군 영풍그룹은 1974년 고려아연을 설립했다. 두 가문은 고려아연 경영을 최씨 일가가, 영풍과 전자 계열사 경영을 장씨 일가가 맡는 방식으로 오랜 기간 협력해 왔다. 그러나 지난 2022년 최윤범 회장 취임을 전후로 양측이 고려아연 지분 확보 경쟁에 나서면서 갈등이 시작됐다. 신사업 투자와 배당 정책 등을 둘러싼 이견은 이사회와 주주총회에서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이번 소송 역시 영풍이 MBK파트너스와 손잡고 고려아연 경영권 확보를 위한 공개매수에 나서자 고려아연이 자기주식 공개매수로 맞대응하면서 촉발된 양측의 경영권 분쟁에서 비롯됐다.
zionwkd@news1.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