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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대한성공회 주교가 인천 강화에 위치한 '우리마을'에서 예종석의 파워인터뷰를 하고 있다.(사진=김태형 기자)
평생 발달장애인과 철거민, 외국인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의 곁을 지켜온 김성수(97) 대한성공회 주교는 ‘나’보다 ‘우리’라는 말에 힘을 줬다. 국적과 장애유무를 불문하고 누구도 우리라는 단어 밖으로 밀려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다.
그에게 장애인을 돕는 일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공동체 일원으로 당연히 해야 할 몫이었다. 김 주교는 “발달장애인이 유용하게 자기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우리가 함께 사는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발달장애인 특수학교를 만들고 졸업생들의 일터를 고민하고 자신의 땅을 내놓아 공동체를 세운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학교와 일터를 거쳐 주거와 노후까지 이어지는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삶을 만드는 건 김 주교의 오랜 목표였다. “학교를 만들었더니 졸업한 아이들이 갈 데가 없었다”며 “일할 곳을 만든 이유다. 그런데 이제는 그 친구들도 나이가 들고 있어요.”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음 삶의 문제가 나타났다. 10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김 주교가 여전히 발달당애인들의 ‘다음’을 고민하는 이유다.
-34세에 늦깎이 사제가 됐다.
△일제시대에 학교를 다녔고 해방 뒤에는 학교 분위기도 많이 어수선했다. 운동을 참 좋아해서 여름에는 농구를, 겨울에는 아이스하키를 했다. 한번은 시합에 나갔다가 각혈까지 했다. 학교를 겨우 졸업하니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오히려 그 전쟁이 나를 살렸다. 나는 강화로 내려와 10년 가까이 지내며 건강을 회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앞으로는 대학 졸업장 없이는 안 된다’고 말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성공회는 원래 우리 집안의 신앙이었다. 그렇게 공부하고 신앙 안에서 길을 찾다 보니 결국 사제가 됐다.
-1970년대부터 발달장애인 복지에 관여해왔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처음부터 장애인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다. 고아원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다 커서 나가면서 문을 닫게 됐다. 그랬더니 당시 주교가 복지사업을 맡을 것을 권했다. 내가 그때 뭘 알았겠나. 그냥 시작했다. 그렇게 학교도 만들다보니 오늘날 ‘우리마을’ 조성까지 이어졌다. 갈수록 더 어렵다는 걸 느낀다. 우리나라 경제규모가 세계 10위권이고 100억원짜리 집에 사는 젊은 사람들도 많다는데 정작 어려운 사람을 돌아보는 마음은 예전보다 옅어진 것 같다.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는 젊은 세대가 되면 좋겠다.
-상계동 철거민촌의 나눔의집과 외국인 노동자 쉼터인 마석 샬로메집도 교구장 재임 시절 자리를 잡았다.
△그것도 내가 한 게 아니다. 현장 신부들이 한 거다. 이근홍 신부 이름도 꼭 좀 넣어달라. 상계동도 신부 두 사람이 시작했다. 그 사람들이 꼭 해야 한다고 하는데 내가 안 된다고 할 수 없었다. 교구장으로서 박수 쳐준 것뿐이다. 실제로 고생한 사람들은 따로 있다.
-성공회 사제들은 유독 어려운 현장에 많이 간다는 인상도 있다.
△본인들이 원해서 한 일이다. 정말 해서는 안 될 일이라면 말리겠지만 내가 못하고 우리가 못하는 일을 신부가 하나 나서서 하겠다고 하면 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계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겠나. 안 그러면 세상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김성수 대한성공회 주교가 ‘우리마을’ 교회 강대상 위 예수 목상을 설명하고 있다. 김 주교는 “십자가를 두니 발달장애인들이 이해하지 못해 예수님의 모습과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장면을 함께 넣었다. 그랬더니 훨씬 잘 이해하더라”고 말했다. (사진=김태형 기자)
△베드로학교(지적장애인을 위한 교육시설)를 만들었더니 졸업한 아이들이 갈 데가 없었다. 부모들이 자신들의 아이 진로를 물었다. 그래서 일할 곳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직업시설을 만들려니 땅이 필요했고 그때 강화에 물려받은 땅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물려받은 땅을 내놓으면서 시작하게 됐다. 이 땅은 아버지가 주셨지만 사실 어머니가 땅을 지켰다. 부친 작고 후 주변 사람들이 땅을 팔라고 했지만 어머니께서는 팔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선견지명이 있었던 거다.
-콩나물 공장(발달장애인 직업 재활시설)은 특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다.
△발달장애를 가진 친구들이 직접 일울 해서 돈을 번다. 월급을 120만원 넘게 받는 사람도 있고 그 돈을 모아서 혼자 살거나 여행을 가는 사람도 있다. 더 많이 주고 싶어도 쉽지가 않아 마음이 아프다. 발달장애인이 유용하게 자기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우리가 함께 사는 거다.
-늘 ‘우리’라는 말을 특히 강조한다.
△예수님도 하느님을 부를 때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했다. 대한민국 사람이든 중국 사람이든 일본 사람이든 아프리카 사람이든 결국 아버지는 하나다. 발달장애인도 우리 아버지의 자녀다. 그러니까 손을 더 잡고 살아야 한다. 교인들이 우리 아버지라는 말을 다시 한번 생각했으면 좋겠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서울주교좌성당은 시민사회 인사와 학생들의 피신처이자 대책본부 역할을 했다.
△그때는 학생들도 들어오고 경찰도 오고 엄혹한 때였다. 그런데 이것도 우리 신부들이 금식기도를 하고 평화를 빌며 다 같이 한 일이다. 마치 내가 다 한 것처럼 하면 안 된다.
-주교님의 허락이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사람들이 이미 들어와 있는데 내가 성직자라고 들어온 사람들을 다 내쫓으라고 하나. 어떻게 그러나. 당시 대회를 준비한 신부가 사람들을 미리 자기 집에 데려다 놓고 같이 먹고 자면서 준비했다. 통행금지가 있으니까 미리 들어오게 한 거다. 그런 식으로 앞을 내다보고 준비한 신부들이 있었기 때문에 대회가 성공할 수 있었다.
-역사에는 주교님의 이름이 더 크게 남았다.
△그게 늘 미안하다. 나는 미사를 올린 것뿐인데 정작 앞에서 준비한 사람 이름은 어디로 가고 김성수만 자꾸 나온다. 내가 대표였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 이름을 좀 넣어달라.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민주주의가 온 거다.
김성수 대한성공회 주교가 건강 비결을 이야기하며 팔을 들어 보이고 있다. 김 주교는 “학교 다닐 때 전학 온 친구가 아이스하키를 같이 하자고 해서 스케이트도 한 번 타보지 않은 채 시작했다. 여름에는 농구를 했다”며 “젊을 때 열심히 운동한 게 지금까지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사진=김태형 기자)
△그렇게 말하면 내가 굉장한 사람처럼 되잖나. 내가 돈을 쓸 수 있었던 것도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누군가 쓸 데가 많을 것이라면서 1000만원을 준 적도 있다. 나도 내 돈을 쓴 건 사실이지만 도움을 받아서 한 거다. 그걸 꼭 말하고 싶다.
-그렇게 나눠주고 나면 생활은 어떻게 했나.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건 아니지 않나. 하하. 우리 집사람이 참 잘해줬다. 월급이 왜 그렇게 적으냐고 한마디도 안 했다. 내가 밖에서 이것저것 벌이고 다니는 동안 집사람은 고생이 많았다.
-부인과는 어떻게 만났나.
△아내가 영국 성공회 선교사로 와서 일하고 있었다. 내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만났다. 영어를 잘 못하니까 일본말 반, 영어 반, 우리말 반으로 얘기했다. 하하.
-발달장애 영유아 교육에도 일찍 관심을 가졌다.
△발달장애인을 보다 보니 유치원부터 해야겠더라. 처음에는 외국 사람들이 도와줬는데 결국 한국 아이들은 한국 사람들이 교육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유치원을 시작했다. 나는 발달장애인을 위해 ‘요람에서 무덤까지’ 가고 싶은 거다. 유치원, 학교, 일할 곳, 살 곳, 이제는 양로원까지 있어야 한다.
-최근 미국 LA의 100년 역사를 가진 ‘성 야고보 성공회 교회’에 주교님의 석상이 봉헌됐다.
△개인적으로는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그렇게 높여놓는 것도 좀 그렇지 않나. 우리 신부들 중에서도 너무 이른 것 아니냐고 했다. 나는 하느님한테 100세를 넘기지 않게 하고 오늘 당장 데려가 달라는 얘기도 한다.
-주교님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도 나왔다.
△영화를 보면서 저 사람들(영화 제작진)이 나를 어떻게 생각해서 저렇게 만들었나. 내가 그렇지 않은데 내 속마음을 몰라서 저러는구나라고 생각 했다. 만들어주신 분들에게는 감사하다. 그런데 송구스럽고 부끄럽다. 또 그것 때문에 이렇게 사람들이 찾아오고 그러니까.
-발달장애인노인 그룹홈을 인생의 마지막 큰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학교를 만들면 졸업 후가 문제여서 일할 곳을 만들고 나니 나이 드는 게 문제다. 우리 친구들도 나이를 먹고 부모들도 같이 늙는다. 그러면 마지막에 어디에서 살겠나. 기존 장애인시설에서는 노인을 이유로 노인시설에서는 장애를 이유로 서비스에서 모두 소외되는 상황이다. 그래서 발달장애인들이 나이 들어서 살 곳을 만들어야 한다.
-총 사업비가 30억원 정도 든다고 들었는제 재원 마련 계획은.
△이제는 나를 아는 사람도 점점 없어지고 어디 가서 손을 벌리기도 쉽지 않다. 어떻게 돈을 마련해야 하나 걱정이 많았다. 미국에 살던 막내동생이 한국에 와서 최근 같이 저녁을 먹다가 우리마을에 100만달러, 우리 돈으로 14억원 정도를 내겠다는 거다. 내가 먼저 도와달라고 한 적도 없었다. 속마음은 좀 도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말은 못 했다. 그런데 동생이 큰 부분을 보태주겠다고 하니 정말 고마웠다.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누군가 문을 열어주는구나 싶었다. 나는 그런 걸 하느님이 해주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30억원을 다 마련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후원금을 모으는 것만으로 끝나는 문제도 아닌가 보다.
△우리마을로 들어온 돈은 우리마을을 위해서만 써야 한다. 같은 장애인 사업이라도 새로 추진하는 발달장애노인 그룹홈에 마음대로 쓸 수가 없다. 왜 그런 규정을 만들었는지는 안다. 기존의 복지관련 업무를 사람들이 얼마나 나쁜 일을 많이 했으면 그렇게 했겠나. 그런데 새로운 일을 제대로 하려는 사람도 똑같이 막히니까 답답하다.
-발달장애노인 그룹홈 건립도 제도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나.
△4명이 함께 사는 그룹홈에 지원되는 돌봄 인력은 한 명 수준이다. 네 사람이 365일 24시간 살아야 하는 집인데 한 사람이 어떻게 다 돌보겠나. 우리가 만들려는 건 잠깐 머무는 시설이 아니라 이 친구들이 늙어서도 계속 살아갈 집이다. 공무원들이 법이나 지침을 만들려면 이런 데 와서 며칠이라도 먹고 지내면서 애로사항을 알아야 한다. 책상에서 규정만 만들면 현실과 맞지 않는 게 생긴다.
-백수를 바라보는 연세인데 건강 비결이 있나.
△내가 지금 걷는 게 좀 이상하죠? 하하. 나는 운동하면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 같다. 젊었을 때 운동을 많이 해서 지금 버티는 건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건강이라는 게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 도와주셔야 한다. 딸이 와서 밥도 해주고 아들도 챙겨준다. 그런 사람들 덕분에 내가 있는 거다.
-마음을 편안하게 갖는 것도 건강 비결인가.
△그런 것 같다. 남을 너무 미워한다든가 내가 너무 잘났다고 한다든가, 그런 마음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가지면 여러 가지가 순조로워지는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나도 중학교 때 왜 그렇게 한 친구를 미워했나 싶다. 아직도 미안하다. 주변에서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크다.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것도 건강에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인터뷰 내내 ‘내가 한 게 아니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정말 내가 한 게 아니다. 이름 없이 일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신부들이 하겠다고 하면 나는 옆에서 박수치면서 응원해준 것밖에 없다. 현장에서 직접 일한 건 그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 이름이 빠지고 내 이름만 남으면 안 된다.
김성수 주교와 예종석 대기자가 '우리마을' 벽화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김태형 기자)
△1930년 인천 강화 출생 △배재중학(현 배재고) △단국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성공회 성미가엘신학원 졸업 △연세대 명예신학박사 △1964년 대한성공회 사제 서품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장 △대한성공회 초대 관구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회장 △성공회대 총장 △푸르메재단 초대 이사장 △현 푸르메재단 명예이사장·강화 우리마을 촌장·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사회복지재단 명예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