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판결문은 사건의 결론을 담지만,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은 법률 용어 뒤에 가려져 있다.
[그날의 이유]는 법원 판결문에 기록된 사실을 바탕으로 사건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재구성한다. 한 사건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일어났는지, 그 과정에서 무엇이 있었는지, 그리고 법원이 책임과 결과를 어떻게 판단했는지를 따라간다.
누군가를 이해하거나 변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판결문에 남은 기록을 통해 사건이 우리 사회에 남긴 질문을 함께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데일리 최정희 기자] 2024년 3월초, 김 씨는 지인에게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캄보디아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는 일이다. 어려운 것 하나도 없고,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한 달에 급여는 8000달러니까 한 달만 일해보자.”
그 당시 우리나라 돈으로 한 달에 무려 약 1000만원을 벌 수 있는 일이었다.
김 씨(가명)는 3월 29일, 캄보디아로 향했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수도 프놈펜의 ‘망고단지’였다.
건물 안에는 컴퓨터, 책상, 의자 등이 갖춰져 있었다. 여러 사람이 각자 맡은 일을 하고 있었고, 이곳의 직원들은 함께 숙소 생활을 했다.
겉으로 보기에 일반 회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이곳은 평범한 회사가 아니었다. 한국인들을 상대로 주식 투자 사기를 벌이는 범죄 조직의 근거지였다.
[본 이미지는 AI 기술을 활용해 제작되었습니다.]
김 씨가 맡은 일은 ‘고객센터 직원’. 이곳의 유일한 한국인 여성이었다.
고객센터 직원은 월 8000~1만달러, 영업팀원은 기본금 800~2000달러를 받는 곳이었다. 영업팀보다 고객센터 직원이 최대 5~10배의 월급을 받는 곳.
이 조직은 김 씨가 가담하기 두 달 전에 만들어졌다. 2024년 1월, 중국인 총책 등이 망고단지에 사무실을 차렸다. 조직의 최상단에는 이 중국인 총책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조직을 관리하는 총괄 책임자, 그 밑에는 영업팀장과 팀원이 배치됐다.
영업팀은 피해자들을 모집하고 돈을 입금하도록 설득했다. 홍보팀은 주식 투자 광고를 제작했고 시나리오팀은 피해자들을 설득할 대본을 만들었다. 기술팀은 가짜 주식 거래 사이트를 제작했다. 통역팀, 자금세탁팀도 운영됐다.
그리고 김 씨가 있었던 고객센터는 피해자들에게 입금 계좌를 안내하거나 투자 사기 의심을 해소하는 역할을 했다. 이들의 목적은 한국인의 돈을 노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김 씨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조직원들은 서로 가명을 사용했고, 대포폰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업무지시는 텔레그램. 총책의 허락 없이는 망고단지 밖을 나갈 수도 없었다.
지각하면 벌금 100달러, 무단결근 300달러. 근무 중 졸다가 걸리면 50달러, 세 번 걸리면 200달러가 부과됐다. 평일 밤 11시 이후에는 술도 금지됐다. 도박, 마약도 금지 대상이었다. 실적이 부진하면 불이익을 받았고, 피해자한테 돈을 많이 뜯어내면 인센티브가 지급됐다.
◇‘무료 강의’ 들으러 오세요
이들이 한국인을 유혹하는 첫 단계는 주식 ‘무료 강의’였다. 조직원들은 소셜미디어(SNS)에 주식 투자 광고를 올리거나 불특정 다수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주식 종목을 분석해주거나 투자 정보를 알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관심을 보이면 네이버밴드나 카카오톡, 텔레그램 대화방으로 초대했다. 유명 투자 전문가를 사칭해 주식 종목을 분석해줬고 무료 유튜브 강의도 제공했다. 심지어 피해자가 보유한 주식의 차트를 분석해주고 기프티콘까지 선물했다.
피해자들은 자신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씨(가명)도 마찬가지였다. 2024년 4월말, 텔레그램 단체 대화방에 초대된 이 씨에게 이들은 ‘IB-7프로젝트’를 소개했다. 공모주 공동 청약을 통해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공모주 매수를 진행하고, 상장되면 큰 수익을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씨는 이들의 말을 믿고 가짜 투자 사이트에 가입했다.
대화방에서는 다른 피해자들이 수익을 올렸다는 인증이 올라왔다. 이들은 실제 피해자가 아니었으나 이 씨 등의 피해자들은 이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 씨가 가입한 가짜 투자 사이트는 실제 증권사의 홈트레이딩시스템(HTS)과 비슷하게 만들어졌다. 주식을 사고파는 화면이 있었고, 주가 등락 그래프, 보유 자산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나스닥, 코스닥 등 국내외 주가 지수 데이터까지 실시간으로 제공됐다. 돈을 입금하면 계좌에 주식이 들어온 것처럼 표시됐다. 주식을 팔면 계좌 잔액이 늘어난 것처럼 표시됐다.
그래도 피해자들이 가짜 투자 사이트에 큰 돈을 입금하려면 신뢰 형성이 필수적이었다. 이때 김 씨의 역할이 중요했다. 피해자들 입장에서 텔레그램으로 누군가와 소통을 하긴 하지만, 그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그녀의 전화 한 통은 피해자들을 믿게 만들었다.
김 씨는 2024년 4월 30일, 이 씨와 카카오톡으로 통화를 했고, 5월 12일에는 이 씨에게 먼저 전화를 걸기도 했다. 매니저로서의 전화 통화였다. 이 씨와의 통화를 거의 마지막으로 김 씨는 그 다음 날인 5월 13일, 캄보디아를 떠나 한국으로 입국했다.
김 씨는 조직을 떠났지만, 김 씨 등에게 속은 이 씨는 6월 4일, 5000만원의 거액을 입금했다.
이들이 만들었다는 투자 사이트의 모든 것이 가짜였다. 실제 주식은 한 번도 거래되지 않았다. 피해자가 매수, 매도 버튼을 눌러도 주문은 이뤄지지 않았다. 계좌에 표시된 주식과 수익금은 이들 조직이 꾸며낸 숫자에 불과했다.
피해자가 수익금을 출금하려고 하면 세금과 수수료를 먼저 내라고 했다. 큰돈을 벌었다고 생각한 피해자들은 이 세금과 수수료를 기꺼이 냈다. 이 거래의 마지막은 투자 사이트 폐쇄로 끝났다.
[본 이미지는 AI 기술을 활용해 제작되었습니다.]
김 씨는 주식 사기 조직을 나온 지 1년이 조금 지난 2025년 8월, 1심 선고를 받았다. 1심은 김 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하고 약 70만원을 추징하는 선고를 내렸다.
사실 그녀는 본인이 캄보디아에서 할 일이 단순히 전화를 걸고 받는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캄보디아로 도착한 직후 공항에서 망고단지로 가는 길에 지인은 그녀에게 이 일이 ‘사기를 치는 일’임을 알려줬다.
그녀가 자백을 한데다 범죄에 가담하긴 했으나 일부의 역할만 했고, 피해금이 입금되기 전에 조직을 탈퇴했고, 김 씨가 얻은 이익이 적고, 초범이라는 점이 감안된 판결이었다.
1심(2025고단1612)에서 피해자로 인정된 사람은 31명, 피해액은 47억원이 넘었다. 1심에선 피해 기간을 2024년 6월 3일~7월 9일까지로 봤다. 그런데 이 기간은 김 씨가 조직을 탈퇴한 이후였다.
김 씨와 검찰 모두 항소했다. 검찰은 항소심에서 범행 기간과 피해 규모를 확대하는 내용으로 공소장을 변경했다. 범행 기간은 2024년 4월부터 7월까지로 늘어났다. 피해자는 62명, 피해액은 84억원으로 급증했다. 하지만 김 씨는 2심에서 태도가 돌변했다. 1심에서 했던 ‘자백’을 모두 바꾼다. 이것은 그녀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을까.
이어서 “감금·폭행당했다”더니…41일 만에 또 캄보디아행②[그날의 이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