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조 연금의 ‘달러 손’…국민연금이 왜 환율의 캐스팅보트가 됐나

주식

이데일리,

2025년 12월 03일, 오후 10:50

[이데일리 마켓in 지영의 기자] 원·달러 환율 1400원대가 뉴노멀이 되자 국민연금의 해외투자가 환율 수급에 미치는 영향이 도마에 올랐다. 해외투자 규모를 800조원까지 늘린 국민연금이 외환시장에 구조적 수요를 만들어내면서 기금운용 원칙과 방향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국민연금을 환율 조정 수단으로 개입시키는 방식은 장기 수익성과 연금의 지속가능성을 훼손할 수 있어, 정책 대응의 범위와 한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비판이 거세다.

3일 국민연금에 따르면 지난 9월 말 기준 적립금 규모는 1361조2000억원으로 집계됐다. 지난 2010년 300조원에 불과했던 적립금이 4배 이상 성장한 셈이다.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2292조원의 절반을 넘어선 수준으로, 적립금 기준 세계 연기금 중 세 번째에 달한다.

[이데일리 김정훈 기자]


국민연금의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해외 비중이 크게 늘었다. 1361조2000억원의 자산 가운데 해외주식이 37.3%, 국내채권 23.6%, 대체투자 15.9%, 국내주식 15.6%, 해외채권 7.1%, 단기자금 0.3% 등이다. 이 중 해외투자 금액은 총 798조540억원에 달한다. 해외주식 508조원, 해외채권 98조원, 해외대체투자 19조원이다. 지난 2021년 415조원이었던 해외투자 금액이 수년 사이에 800조원 가까이 늘었다.

특히 국민연금은 전략적 자산배분과 전술적 자산배분을 병행하며 목표 대비 ±5%포인트 범위 안에서 비중을 조정한다. 올해처럼 국내 증시가 반등한 구간에서는 국내 주식 차익 실현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 자금이 해외 주식 매수로 이어질 경우 추가적인 달러 수요가 유입됐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단순 리밸런싱만으로 외환 수급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외환시장 규모 측면에서도 국민연금의 존재감은 두드러진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11월 말 기준 외환보유액은 4306억6000만달러(약 632조원)이다. 이는 국민연금이 지난 9월 말 기준 보유한 해외자산 약 798조원보다 적다. 외환시장의 안정판 역할을 하는 외환보유액보다, 국내 최대 연기금의 해외투자 규모가 더 큰 상황인 셈이다.

정부가 환율 논의에서 국민연금을 거론하는 배경도 해외투자 규모 급증과 무관하지 않다. 국민연금의 달러 조달이 연간 수십조원 단위로 반복되며 외환시장에 상시적 매수 수요를 형성하는 구조적 요인으로 자리 잡았다는 평가다.

이에 정부와 시장 일각에서는 외환 불안이 반복될 때 최소한의 조정 역할을 연금이 맡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실정이다. 다만 연금을 정책 수단으로 활용할 경우 기금운용 원칙이 흔들리고 장기 수익성과 지속가능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중론도 만만치 않다.

국민연금이 외환시장 충격을 줄이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장치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한국은행과의 외환스와프다. 국민연금이 직접 시장에서 달러를 사들이면 원화 약세가 단기적으로 확대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한국은행 외환보유액에서 달러를 ‘빌려 쓰는’ 방식이다. 스와프 규모는 지난 2022년 9월 100억달러에서 지난 2023년 4월 350억달러, 지난해 6월 500억달러로 늘었다. 이어 지난해 연말에는 650억달러로 확대됐다.

두 번째는 전략적 환헤지다. 선물·스와프 같은 파생상품을 사용해 실제 달러를 팔지 않아도 ‘달러를 팔고 원화를 사는 것과 같은 효과’를 만드는 방식이다. 외환스와프가 보유고 내부 거래라면, 전략적 환헤지는 시장에 달러 공급을 만들어내 환율에 바로 영향을 미친다.

다만 시장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에 환율 상승의 책임을 과도하게 돌리는 시각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현재 고환율이 미국 경제와 글로벌 달러 수급 구조 등 거시적인 영향이 상당해 국민연금을 동원해도 효과가 적고 부작용만 남길 수 있다는 지적이다.

서은숙 상명대 경제금융학부 교수는 "고환율의 가장 큰 원인은 미국의 경제 상황이다. 미국 연준이 금리 인하 속도가 조절내면서 한미 금리 격차가 계속 유지 되고 있다"며 "여기에 미국 재무부가 과거와 달리 단기채권 발행 비중을 60% 가까이 확대하면서 전세계의 달러수요를 불러오면서 달러가치가 급격히 올랐다"고 설명했다.

이어 "미국에 대한 대규모 투자 요구 등도 달러 수요를 뒷받침하고 있고, 국내 일반 투자자들의 해외 투자 확대도 그 원인이 되는 측면은 있다"고 지적했다.

다만 서 교수는 "그러나 국민연금은 국민의 노후 자금이기 때문에 '수익률'이 최우선이어야 한다"며 "환율 방어에 동원됐다가 손해를 보면 안 된다는 비판은 타당하다. 한국은행과의 외환 스왑을 더 늘린다든지 하는 수준에서 환율 급등을 막는 제한적인 범주에서 역할은 할 수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도 "만약 환율이 계속 올라간다면 외환보유고 소진 등은 매우 위험한 방식이라 국민연금이 역할을 하는 방법 밖에는 수단이 거의 없기는 하다"며 "다만 국민연금 동원도 일시적인 효과에 그쳐서 결국 정부가 해야할 일은 글로벌 기준에 맞지 않는 과세 제도나 노동 제도, 기업의 체질 개선 등을 통해 국내로 투자가 들어오게 해 환율을 안정시키는 방향"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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