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리스크에…독일·이탈리아 “美에 맡겨둔 금 가져와야”

해외

이데일리,

2025년 6월 23일, 오후 05:12

[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미국에 맡겨놓은 실물 금(金)을 본국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연방준비제도(Fed·연준)를 압박하고 있는 데다, 글로벌 지정학적 불안까지 확산하고 있어서다.

(사진=AFP)


◇“美, 안전하고 믿을만 했지만…이젠 아냐”

독일 극좌 포퓰리스트 정당인 자라바겐크네히트연합(BSW) 소속 파비오 드 마시 연방 하원의원은 23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격동의 시대에 직면해 더 많은 (실물) 금을 유럽이나 독일로 이전해야 한다는 강력한 주장이 있다”고 말했다.

앞서 이탈리아에서도 경제 평론가인 엔리코 그라치니가 지난 4월 조르자 멜로니 총리의 미국 방문을 앞두고 언론 기고를 통해 “신뢰할 수 없는 트럼프 행정부에 이탈리아 금 보유고의 43%를 남겨두는 것은 국가 이익에 매우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세계금협회(WGC)에 따르면 독일과 이탈리아의 금 보유량은 각각 3352톤과 2452톤으로,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와 3위를 차지하고 있다. 독일은 뉴욕 연방준비은행(연은)에 1200톤의 금을, 이탈리아는 1000톤의 금을 각각 맡겨두고 있다. 전체 금 보유량의 3분의 1 이상이다.

당초 독일과 이탈리아가 뉴욕 연은에 금을 보관하게 된 것은 뉴욕이 전 세계에서 금 거래가 가장 활발한 중심지 중 한 곳이기 때문이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금을 거래할 경우 외환으로 전환(스와프)하는 데 있어 유동성과 접근성이 매우 뛰어나다. 이 과정에서 뉴욕 연은이 금 보관에는 수수료를 받지 않고, 금을 다른 곳으로 옮길 때에만 비용을 부과하는 영향도 있다.

또한 미국은 그동안 군사적·정치적으로 가장 안전한 국가로 인식돼 도난 등의 위험이 작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유럽 부흥계획(마셜플랜)과 브레턴우즈 체제(달러-금본위제) 하에 유럽 국가들이 무역 흑자와 외환 보유고를 금으로 전환해 미국에 쌓아두는 관행이 자리잡았고, 냉전 시절엔 옛 소련의 위협에 대비해 미국에 분산 보관하는 게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트럼프 변덕에 “실물 통제권 회수해야” 여론 확산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미국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가 최근 연준의 통화정책에 ‘강제 조치’를 언급하고, 동맹국들과도 갈등 국면을 반복하고 있어서다. 이에 독일과 이탈리아를 비롯해 유럽에선 미국 내 금 보관이 과연 안전한가라는 인식이 확산했다.

유럽 납세자협회는 최근 “연준의 독립성 훼손 우려, 트럼프 대통령의 변덕스러운 정책은 금의 실물 통제권을 본국이 가져야 할 이유다. 불확실한 시대에 금은 반드시 유럽으로 옮겨와야 한다”며 각국 중앙은행 및 정부에 공식 요청서를 발송했다.

독일에선 좌파와 우파를 가리지 않고 금을 독일로 가져와야 한다는 여론이 퍼지고 있다고 FT는 전했다. 이미 2013년부터 2017년까지 300톤의 금을 뉴욕·파리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옮긴 전력도 있다. 바이에른 기독사회연합(CSU)의 피터 가우바일러 전 의원은 “지정학적 리스크가 커진 현재, 금을 해외에 두는 것이 더 안전한지 재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탈리아에서는 2019년부터 “금은 국민의 것”이라는 목소리가 커졌다. 아울러 멜로니 총리는 야당 의원이었던 시절에 금을 본국으로 가져오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이탈리아는 전체 금 보유량의 약 절반을 로마에, 나머지는 뉴욕·런던·베른 등에 분산 보관하고 있다.

◇일각선 “美-EU 관계 악화 가능성” 우려 목소리도

일각에선 미국과의 동맹 및 신뢰 관계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독일 중앙은행(분데스방크)은 “뉴욕 연은은 여전히 신뢰할 만한 파트너”라며 금의 유동성·시장 접근성 등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부 전문가들도 “금의 본국 이송을 대대적으로 추진하면 미국과 유럽연합(EU)의 관계 악화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멜로니 총리 역시 집권 후에는 미국과의 우호 관계를 의식해 관련 공약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다.

한편 독일과 이탈리아의 움직임은 최근 세계 각국 중앙은행들이 금 보유량을 늘리고 있는 것과도 궤를 같이 한다. 전 세계 중앙은행들은 2022~2024년 3년 연속 연간 1000톤 이상의 금을 추가 매입했고, 이에 따라 금은 유로화를 제치고 세계 2위의 외환보유 자산이 됐다.

FT는 “유럽뿐 아니라 인도, 폴란드, 튀르키예 등도 금의 국내 보관을 강화하는 추세”라며 “트럼프 대통령의 연준 압박, 미-EU 갈등, 지정학적 위기감이 맞물려 금을 본국으로 되돌리려는 자산주권 논쟁이 유럽에서 다시 불붙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