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이 중국 외교부장. (사진=AFP)
복수의 소식통에 따르면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전날 벨기에 브뤼셀에서 카야 칼라스 EU 외교·안보정책 고위대표(전 에스토니아 총리)와 회담하며 “중국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패배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만약 러시아가 진다면 미국이 중국으로 모든 외교·군사적 초점을 돌릴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외교 정책이 대중 압박으로 전환할 것을 우려한다는 얘기다.
이는 중국이 “우리는 전쟁 당사자가 아니다”라며 러시아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부인한 것이어서 외교가에 큰 파장을 낳고 있다. 회담에 참석한 일부 EU 관계자들은 왕 부장의 솔직한 발언에 “이례적이고 노골적이고 현실주의적 메시지”라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SCMP는 전했다.
왕 부장은 다만 “중국이 러시아의 전쟁 노력을 재정적·군사적·실질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만약 우리가 진짜 지원했다면 전쟁은 진작 끝났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EU는 중국이 러시아에 이중용도(민간·군 겸용) 물자와 기술을 제공하고 있다고 보고 제재를 강화하고 있다. EU는 이달 중 18차 대(對)러시아 제재 패키지로 중국 소형 은행 2곳을 블랙리스트에 올릴 예정이다. 이에 왕 부장은 “실제로 제재가 이뤄질 경우 반드시 보복하겠다”고 경고했다.
이번 회담에서는 중국의 희토류 수출 규제, 무역 불균형, 시장 왜곡 등 경제 현안도 거론됐다. 최근 중국이 희토류·자석 수출을 제한하면서 유럽 제조업체들이 생산 차질을 빚고 있다. 이에 EU는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불똥이 유럽으로 튀고 있다”며 구조적 해결책을 촉구했다.
그러나 왕 부장은 “수출 허가 절차를 6주에서 3주로 단축했다. 개별 기업이 불만이 있으면 중국 정부에 직접 문제를 제기하라”며 원론적 답변만 되풀이했다. 마치 중국이 EU를 무시하는 것 같은 모습이어서 회담 분위기는 서로 존중은 하되 긴장감이 감돌았다는 후문이다.
중국 외교부는 왕 부장과 칼라스 대표와의 회담 후 성명을 내고 “중국과 EU 사이에는 근본적인 이해 충돌이 없으며, 광범위한 공동 이익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유럽은 현재 다양한 도전에 직면해 있지만,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그 어떤 도전도 중국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라며 “양측은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 배우고, 함께 발전하고 진보하며, 인류 문명에 새로운 기여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왕 부장은 EU와 중국은 수교 50주년을 앞두고 안토니오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도 회동했다. 양측은 오는 24~25일 베이징·안후이성에서 정상회담을 개최할 예정이다. EU는 대러시아 제재, 희토류, 무역 등 주요 현안에서 중국과의 입장차를 좁히지 못해 실질적 성과는 기후변화 대응 등 일부에 그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