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 20일 일본 가고시마현 가고시마 남부 해역에서 실시된 해상훈련 중,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함정 ‘아사나기’의 선미에 일본 국기가 휘날리고 있으며, 배경에는 사쿠라지마 화산(좌측)이 우뚝 솟아 있다.(사진=AFP)
지난 7월 23일 실적 발표 기자회견장에서 이마바리조선의 히가키 유키토 사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전날 일본과 미국은 관세 합의의 일환으로 총 5500억 달러(764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 방침을 발표했고, 그 안에는 ‘상업 및 방위 조선 분야’도 포함됐다. 하지만 정작 일본 조선업계는 미온적이다.
히가키 사장은 “국토교통성으로부터 미국과의 조선 협력을 요청받았지만, 현재 일본의 조선 건조량 점유율은 13%로 하락했다”며 “현재로서 미국에 자본을 투입할 생각이 없다”라고 말했다.
◇日 조선업계 “미국은 인건비 높고 공급망도 없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19일 ‘미국 조선 지원, 물 들어와도 노 못 젖는 일본…한국은 22조엔 투자’라는 기사에서 대규모 대미 투자 기회가 왔지만, 일본 조선업계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이유는 뚜렷하다. 조선은 노동집약적인 산업으로, 인건비가 높은 미국에서 배를 만들 경우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된다. 일본·한국·중국 기업들이 전 세계에서 치열하게 수주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미국산 선박이 설 자리는 많지 않다는 게 업계 판단이다.
또한 미국 내 조선 산업 공급망도 거의 전무하다. 두꺼운 철판부터 대형 해양엔진, 프로펠러 등 핵심 부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기반이 없다. 히가키 사장은 지난 4월 닛케이와의 인터뷰에서도 “조선업은 10만~20만 개의 부품이 필요한 산업”이라며 “미국에 부품을 가져가 조립하는 자체가 쉽지 않고, 공급망을 새로 구축하려면 5~10년은 걸릴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이 그나마 실현 가능하다고 보는 분야는 미군 함정의 정비 확대다. 조선 능력이 중국의 200분의 1 수준으로 낮아진 미국은 군함 정비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를 일본이 분담하는 방안이 일미 간에서 검토되고 있다.
하지만 이 분야에서도 일본 조선업체들의 반응은 소극적이다. 니시오 히로시 미쓰비시중공업 최고재무책임자(CFO)는 “현재로서는 정비 확대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며 “정부 방침에 따라 가능한 범위 내에서 협력하겠다”고 말했다.
◇韓, 대미 조선 투자에 ‘올인’…“필리십빌도 인수”
반면 한국은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한국은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조선 분야에만 1500억달러(208조원) 투자를 제시했다. 이처럼 적극적인 대미 투자가 가능한 배경으로 닛케이는 한국 조선업의 경쟁력을 들었다. 한국은 조선 건조량 기준 세계 점유율 30%를 차지하고 있으며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한화오션 등 대기업 중심으로 구성돼 규모가 크고 의사 결정이 빠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한화는 2024년 미국 대형 조선사인 필리십빌(Philly Shipyard)을 인수하며 직접 시장 진출에 나섰다. 한국정부와 한국 조선업계는 대규모 대미 조선 투자 기금을 활용해 미국의 선박 수요를 흡수하고, 미국의 정보기술(IT) 기술과 접목한 자율운항 선박 개발에도 나설 계획이다.
일본은 인력 부족으로 조선소 도크조차 가동률이 낮은 상황이다. 장기적인 축소 균형 속에서 기업 체력은 이미 약화됐고, 구조조정도 한국보다 뒤처졌다. 히가키 사장은 “미국 투자보다는 일본 내 조선 역량 확대에 집중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나 글로벌 공급망 재편 속에서 미국 시장을 먼저 선점하려는 한국의 행보가 일본 내에선 위기의 신호로 읽히고 있다.
일본 정부도 뒤늦게 대응에 나섰다. 국가가 조선시설을 건설·매입하고 민간에 운영을 맡기는 ‘국유민영’ 방식의 국립 조선소 설립과 함께 1조 엔(약 9조 원) 규모의 산업기금 조성 방안을 검토 중이다. 닛케이는 “이번 대미투자 전략에서 한국과 다른 길을 선 일본이 성장의 기회를 놓친 ‘실기’로 기록될까, 위험을 회피한 현명한 판단으로 평가될 지는 앞으로의 전략에 달려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