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었지만 부서지지 않았다"… 무너진 자유무역에 WTO사무총장 항변

해외

이데일리,

2025년 10월 16일, 오전 01:07

[워싱턴=이데일리 김상윤 특파원] “세계 무역체제는 타격을 입고 상처받았지만(battered and bruised), 아직 부서지지 않았다(but not broken).”

응고지 오콘조-이웨라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이 1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국제금융협회(IIF) 연례회의에서 미·중 무역갈등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을 진단하며 이같이 말했다.

ㅇ응고지 오콘조-이웨라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이 15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열린 국제금융협회(IIF) 연례회의서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김상윤 특파원)
◇“미중 교역 19% 감소…공급망의 방향이 바뀌고 있다”

오콘조-이웨라 총장은 “세계 최대 경제국이자 WTO 체제의 창립 주체 중 하나인 미국이 규칙 기반 시스템을 벗어난 것은 매우 어렵고 스트레스가 큰 일”이라며 “이는 지난 80년간 세계 무역질서가 겪은 가장 큰 혼란”이라고 밝혔다.

그는 “미국이 세계 무역의 13%를 차지하지만, 나머지 87%는 여전히 WTO 규칙에 따라 거래되고 있다”며 “특히 전체 교역의 72%가 최혜국대우(MFN) 원칙에 기반해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체제의 중심은 여전히 살아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제도를 비판할 근거는 충분하지만, 일방적 조치가 해법은 아니다”라며 “우리는 여전히 미국의 회원국으로서의 역할을 소중히 여긴다”고 덧붙였다.

오콘조-이웨라 총장은 미중 갈등으로 세계 공급망의 지도가 다시 그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올해 1~7월 기준 미중 간 교역량이 19% 감소했다”며 “중국 통계로는 약 14% 감소 수준으로, 세계 양대 경제 간 교류가 급격히 위축됐다”고 밝혔다.

그는 “이로 인해 중국산 제품이 제3국으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며 “동남아시아(베트남·태국·인도네시아 등)로의 수출이 40% 이상 늘었고, 아프리카에서도 38% 증가했다”고 말했다.

반면 멕시코는 미·중 공급망 이동의 반사이익을 기대했지만 오히려 3% 감소, 유럽연합(EU)은 전자·기계·철강 부문 수입이 각각 9%, 3%, 3%가량 증가했다고 덧붙였다.

또 오콘조-이웨라 총장은 “미중 갈등으로 인해 세계 교역의 예측 가능성이 낮아지고 투자 흐름이 왜곡되는 현상이 뚜렷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미국의 관세 정책과 중국의 대응 조치가 단기적으로는 특정 지역의 수출입을 늘리지만, 장기적으로는 글로벌 교역의 안정성을 훼손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회원국들이 이런 불확실성에 대응하기 위해 양자·지역 협정을 강화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며 “이 협정들이 WTO 체제를 대체하기보다 보완하며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 “분쟁해결기구 마비됐지만 대안 작동 중”

오콘조-이웨라 총장은 “1930년대 대공황기처럼 ‘보복 관세전’으로 가지 않은 것이 중요하다”며 “회원국들은 세이프가드(safeguard), 긴급수입제한, 반덤핑, 상계조치 등 WTO가 허용한 합법적 절차를 적극 활용해 시장 충격에 대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WTO의 협의 절차(consultation)와 투명한 분쟁조정 시스템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회원국은 일방 조치가 아닌 제도권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 “이 같은 대응 덕분에 세계 무역의 70% 이상이 여전히 규칙 기반 시스템 안에서 운용되고 있다”며 “회원국들이 자제와 규율을 보여준 점은 주목할 만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의 상소기구(Appellate Body) 임명 거부로 분쟁해결제도가 사실상 마비돼 있다. 이 떄문에 WTO가 미국 중심의 보호무역이 난무하는 이 상황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이에 대해 그는 “2019년 이후에도 50건의 분쟁이 제기됐고, 13건이 현재 진행 중”이라며 “회원국들이 임시 항소중재제도(MPIA)를 활용해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제도 개혁 논의가 진행돼야 하며, 내년 3월 모로코에서 열리는 WTO 각료회의(MC14)에서 구체적 진전이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국의 특혜 포기, 개혁 신호탄...WTO는 세계무역의 배관”

중국이 지난달 ‘개발도상국 특혜(S&D)’를 자진 포기한 결정에 대해 “WTO 개혁을 촉진할 중대한 전환점(pivotal moment)”이라고 평가하며 “이 조치가 인도·남아공 등 다른 신흥국에도 자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회원국들이 모두 불만을 갖고 있다면, 이제는 그 불만을 개혁의 과제로 바꿔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발언 말미에 오콘조-이웨라 총장은 WTO를 “세계 무역의 보이지 않는 배관(plumbing)”에 비유했다. 그는 “사람들은 배관이 새기 전까지는 그 중요성을 잊지만, 파이프가 터지면 그제야 깨닫는다”며 “WTO가 무너지면 세계 무역은 홍수처럼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규칙 기반 시스템을 강화하고, 작동하지 않는 부분은 개혁해야 한다”며 “이번 위기를 개혁의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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