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 총재가 16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국제통화기금(IMF) 본부에서 열린 세계은행-IMF 연차총회 중 세계 경제에 관한 토론에서 연설하고 있다. (사진=AP 연합뉴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19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와 관련해 “(세계 경제가) 아직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라가르드 총재는 이날 미국 CBS방송의 ‘페이스 더 네이션’에 출연, 그가 과거 많은 경제학자들이 관세의 영향을 과대평가했다고 언급한 데 대한 입장을 되묻는 질문에 트럼프 관세로 인한 고통이 이제 막 시작되는 단계라고 지적했다.
라가르드 총재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수출되는 상품에 대해 기존에는 미국 소비자들이 약 1.5%의 관세를 부담했으나 미국 행정부의 결정으로 이 관세가 13%까지 올라갔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추가 관세 약 11%포인트 중 유럽 수출업체와 미국의 수입업체, 소비자가 각각 3분이 1을 부담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라가르드 총재는 수출업자와 수입업자가 부담하고 있는 3분의 2는 결국 이익 마진을 쪼개서 부담하고 있으며 이들이 마진 압박에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라고 지적했다.
앞서 글로벌 금융정보회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글로벌은 지난 16일 발간한 보고서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부과한 관세로 올해 전 세계 기업들이 추가 부담할 비용이 1조2000억달러(약 1700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9000개 기업의 약 1만5000명의 판매 측 애널리스트가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추산했다. S&P는 관세 부담의 약 3분의 1만 기업이 부담하고, 나머지 3분의 2는 소비자에게 전가될 것이라고 추산했다. 또 올해 글로벌 기업의 평균 영업이익률이 0.64%포인트(p) 하락할 것으로 전망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해외 수출업체가 대부분의 관세 부담을 지게 될 것이라고 밝혔지만, 라가르드 총재 역시 S&P와 마찬가지로 관세의 최종 종착지는 소비자가 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와 지난 16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IMF·세계은행 연차총회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로이터)
그는 중국의 희토류 수출 강화와 미국의 대(對)중국 100% 추가 관세 예고로 무역 갈증이 장기화하고 있는 데 대해 양측이 결국 협상 테이블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라가르드 총재는 “현재 양측의 입장 표명은 전형적인 협상 전략의 하나로 흔한 방식”이라며 “서로 근육을 자랑하듯 힘을 과시하고, 마치 ‘죽일 각오가 되어 있다’는 식으로 강하게 나오지만, 결국에는 양국 모두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특히 중국이 희토류 분야에서 전략적 우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중국이 오랜 시간 동안 희토류를 축적하고, 이를 정제하고, 세계에 판매할 수 있는 능력을 구축해왔다”며 “이 분야에서 매우 강력한 무역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 점을 분명히 활용하려 할 것”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 유럽, 그리고 세계 여러 소비국들이 힘을 모아 공동 구매 세력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라가르드 총재는 또 미국 달러화가 기축통화로서 지위에 균열 조짐이 보인다고 경고했다. 최근 나타난 금 가격 급등과 가상자산의 부상을 그 근거로 들었다.
그는 “금은 전통적으로 모든 상황에서 궁극적인 안전자산이며, 올해 초 이후 금값은 50% 이상 상승했다”며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에 대한 신뢰가 다소 약화하고 있다는 명확한 신호”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최근 미국에서 유럽 등으로의 자본 유출 흐름이 나타나고 있는 점에도 주목했다.
라가르드 총재는 신뢰받는 통화의 조건으로 지정학적 신뢰도, 법치주의 와 강력한 제도, 충분한 군사력을 꼽았다. 미국은 이 가운데 한두 가지에서는 여전히 지배적 위치에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그 지위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진적으로 침식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과거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파운드화가 기축통화로서의 위상을 잃은 사례처럼 처음엔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붕괴가 일어날 수 있다”며 “지금이 바로 그런 흥미로운 징후들이 관찰되는 시점”이라고 했다. 이어 라가르드 총재는 “이런 이유로 미국이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와 같은 강력한 제도, 신뢰할 수 있는 거래 환경이 중요하다”며 “행정부가 유발하는 변동성과 불확실성은 달러의 위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