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사진=AFP)
17일(현지시간) 이코노미스트 등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국가반부패수사국(NABU)과 반부패특별검찰청(SAPO)은 지난 8일 국영 원자력기업 ‘에네르고아톰’(Energoatom)에서 최소 1억달러 규모의 횡령을 적발하고, 젤렌스키 대통령 최측근 인사들이 대거 연루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는 15개월에 걸친 수사 결과로, 최측근 인사로는 사업가인 티무르 민디치, 전직 부총리인 올렉시 체르니쇼우, 현직 법무장관인 헤르만 할루셴코와 에너지장관인 스비틀라나 흐린추크 등이 지목됐다.
민디치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코미디언 시절 설립한 TV 제작사 ‘크바르탈 95’의 공동 소유주로, 1억달러 횡령을 주도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에네르고아톰 협력업체들로부터 계약 수주 대가로 최대 15%의 리베이트를 강요하고, 횡령한 불법 자금을 유령 회사를 통해 세탁한 혐의를 받고 있다.
수사 과정에서 민디치 자택에서는 황금으로 된 변기가 발견됐고, 체포 직전 국외로 도피를 시도한 정황도 포착됐다. 일부 자금은 모스크바로 송금된 흔적이 있었으며, 나머지는 키이우 외곽에 건축 중인 고급 빌라 4채의 자금으로 사용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반부패국은 이날 체르니쇼우 전 부총리에 대해서도 체포 영장을 청구했다. 당국이 공개한 녹취록에 따르면 체르니쇼우 전 부총리는 미화 120만달러(약 17억 6000만원)와 10만유로(약 1억 7000만원)를 불법 수수했으며, 이 자금으로 키이우 인근에 고급 주택을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체르니쇼우 전 부총리는 지난 6월에도 별도의 사건에서 뇌물 수수 및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됐다가 7월 보석금을 내고 석방됐다. 체르니쇼우 전 부총리가 지역개발부 장관으로 일할 당시 국유지 개발 승인과 관련해 약 34만 5000달러(약 5억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이 부당거래로 우크라이나 정부는 10억흐리우냐(약 348억원)의 손실을 입었다는 추정도 있다.
녹취록에는 “무거운 현금가방 때문에 허리가 아프다” “전력시설 방호에 돈 쓰는 건 낭비” 등의 대화도 담겼다. 아이러니하게도 피의자들이 방호를 포기한 송전소들은 지난 8일 러시아의 드론 공격을 받았다. 이들이 러시아의 공격과도 관련이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해당 공격이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거센 분노를 일으켰던 만큼 후폭풍도 거세다.
피의자들 모두 관련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가운데, 우크라이나 의회는 18일 흐린추크 에너지장관과 할루셴코 법무장관 해임안을 표결에 부칠 예정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부패 스캔들 규모에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으며, 피의자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했다.
하지만 그 역시 자유롭지 않다는 지적이다. 피의자들이 반부패국의 수사를 방해하기 시작한 시기와 맞물려 대통령실 역시 수사 기관에 압력을 가한 정황이 포착됐기 때문이다. 피의자들은 일부 수사관들을 미행하거나 구금했고, 불법으로 CCTV 영상에 접근하기도 했다.
여당 의원들이 반부패기관들의 독립성을 약화시키는 법안을 추진했던 사실도 뒤늦게 의혹을 키우고 있다. 해당 법안은 대규모 반대 시위가 발발한 이후 철회됐다. 다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피의자들 중 한 명과 통화한 사실만 확인될 뿐, 범죄 연루 정황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번 스캔들을 계기로 국영기업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근본적인 개혁 없이는 파문을 수습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집권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어져 온 구조적인 문제”라면서도 “최측근 인사들이 대거 사건에 연루된 만큼 젤렌스키 대통령의 정치적 타격은 불가피하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로 대통령 비서실장인 안드리 예르막은 직접적인 혐의가 없음에도 자리가 위태롭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정부 내 권력 집중의 상징으로 비판을 한몸에 받고 있어서다. 한 정보당국자는 이번 스캔들에 대해 “원자폭탄급 충격”이라고 묘사했다.
이번 스캔들은 전쟁 수행에도 악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내부적으로는 군대의 사기와 정부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고, 대외적으로는 서방의 대규모 원조를 유지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진단이다.
유럽 외교관들 사이에서는 이미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신뢰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전날 기자회견에서 “이런 스캔들이 계속 터지면 우크라이나와 협력하자고 파트너들을 설득하기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젤렌스키 대통령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일부 인사들이 더 많은 내부 정보를 폭로할 가능성이 있다”며 한 고위 관계자의 말을 빌려 “부패 세력을 끊어내면 살 수 있지만, 머뭇거리면 정치 생명이 끝날 수 있다”고 짚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