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재무장관도 역임한 옐런은 4일(현지시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2026년 전미경제학회(AEA) 연례회의에서 “미국은 아직 재정지배 국면에 있지는 않지만, 그 위험은 분명히 커지고 있다”며 재정 압력이 통화정책을 잠식할 가능성을 짚었다.
옐런은 재정지배를 정부의 적자와 부채가 자금 조달 필요성에 과도한 압력을 가해 통화정책이 그 필요성에 종속되는 상태로 설명했다. 이 경우 중앙은행은 거시경제 여건과 무관하게 금리를 낮게 유지하거나 물가 안정과 고용이 아니라 정부의 재정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국채를 매입하도록 압박받게 된다. 그는 “재정지배는 보통 더 높고 더 변동성이 큰 인플레이션이나 정치적으로 좌우되는 경기 변동을 초래한다”고 경고했다.
옐런은 특히 인플레이션 기대의 훼손을 가장 큰 위험으로 꼽았다. 중앙은행이 금리 인상이나 대차대조표 축소(긴축)에 제약을 받는 순간, 시장과 가계는 ‘빚을 깎는 대신 물가를 올리는 방식’을 선택할 것이라고 믿게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한번 높은 인플레이션 기대가 자리 잡으면, 이를 다시 안정시키는 비용은 훨씬 더 커진다”고 강조했다.
옐런은 다만 현재 미국이 재정지배 체제에 진입했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팬데믹 이후 연준이 급격한 금리 인상에 나서며 재정 부담을 악화시켰음에도 정책을 후퇴시키지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연준의 정책 판단이 재정이나 정치적 고려가 아니라 물가 안정과 고용이라는 책무에 의해 이뤄졌고, 그 결과 장기 인플레이션 기대도 여전히 2% 목표에 부합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평가다.
그러나 옐런은 “재정지배로 이어질 수 있는 전제 조건들은 분명히 강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미 의회예산처(CBO)에 따르면 연방정부 부채는 GDP 대비 약 100% 수준에서 향후 30년간 150% 이상으로 치솟을 전망이다. 순이자 비용도 GDP 대비 3.2%수준에서 5.4%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체 연방 재정적자가 이미 GDP 대비 약 6% 수준에 이른 점도 위험 요인으로 지목했다.
그는 이런 적자 규모는 전쟁이나 심각한 경기침체기를 제외하면 전례가 없으며, 지속적인 적자와 이자 부담 증가, 정치적 교착을 이유로 주요 신용평가사들이 미 국채 등급을 하향 조정한 상황이다. 옐런은 “향후 재정 조정에 대한 신뢰가 약화될 경우 위험 프리미엄 상승과 달러 압박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최근 인공지능(AI)이 생산성을 끌어올려 재정 부담을 완화할 수 있다는 기대에 대해서도 옐런은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그는 생산성 향상이 부채 비율을 낮추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할 수는 있지만, 재정 궤도를 근본적으로 바꿀 만큼 결정적인 수준은 아니라고 평가했다. 오히려 생산성 상승은 균형 실질금리 상승을 동반할 가능성이 있어, 재정 개선 효과를 상쇄할 수 있다는 점도 짚었다.
◇트럼프 금리 압박·연준 이사 해임 시도 직격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정지배 가능성을 키우는 점은 큰 우려라고 옐런은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부채 이자 비용을 낮추기 위해 중립금리 추정치보다 훨씬 낮은 수준의 금리 인하를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등 재정 부담을 이유로 통화정책에 개입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보이고 있다.
그는 또 연준 이사를 정책적 이유로 해임할 수 있다는 주장하는 것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심각하게 위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연준 이사에 대한 ‘정당한 사유’ 해임 기준이 불명확한 상황에서, 실제 해임 시도가 이어질 경우 향후 연준 이사들의 소신 발언 자체가 위축될 수 있다고 우려를 내비친 것이다. 재정지배 위험을 막는 제도적 방파제는 연준의 독립성이지만 트럼프 행정부에서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는 지적이다.
또한 의회 일각에서 추진 중인 연준 감사 추진 법안(Audit the Fed) 법안, 지급준비금 이자(IOER) 제한 시도 등도 “통화정책 결정 과정에 대한 정치적 개입을 제도화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옐런은 재정지배를 피하기 위한 근본 해법으로 신뢰 가능한 중기 재정 조정 경로를 제시했다. 급격한 긴축이 아니라, 부채 비율을 안정화할 수 있다는 정치적 신뢰를 시장에 제공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는 미국이 결국 재정지배의 길로 갈 것이라고 단정하지는 않으면서도 “위험은 실제적이며 지속적인 감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