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후 당일 퇴원?…'무료 의료 78년' 英 충격 실태

해외

이데일리,

2026년 1월 12일, 오후 10:23

[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출산 이후 방치된 느낌을 받았다.”

12일 니혼게이자이(닛케이)신문 등에 따르면 지난해 6월 영국 런던 시내 병원에서 첫 아이를 출산한 한 여성은 “분만 당시 의료진의 처치는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이후에 침대 시트조차 갈아주지 않는 등 불쾌한 기억이 많다”며 이같이 말했다. 닛케이는 이 여성과 같은 경험은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실제 토요일 점심에 입원해 일요일 아침 출산하고 당일 퇴원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영국의 ‘무료 공공의료’ 제도인 국민보건서비스(NHS)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재정 부족으로 의료 현장의 사기가 떨어지고 서비스 품질이 악화하면서다.

(사진=AFP)
영국 의회 의원연맹이 2024년 공개한 ‘출산 트라우마’ 보고서에 따르면 1300명 이상의 산모와 의료 관계자 증언을 조사한 결과 충분한 설명 없는 긴급 제왕절개, 출산 시 통증 완화 실패, 산모 정신건강 지원 부재 등 다양한 문제가 보고됐다. 아울러 매년 약 3만명의 여성이 출산 후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겪는 것으로 집계됐다.

출산 경험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 웨스 스트리팅 보건장관은 지난해 6월 산부인과 의료 전반에 대한 정부 조사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이어 과거 문제 사례가 많았던 병원을 중심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산부인과·신생아 진료 체계 전반을 점검해 개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문제는 의료 서비스에 대한 불만이 산부인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진료 대기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것도 일상이다. 2022년에는 12만명 이상이 진료를 기다리다 사망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핵심은 재정 부족이다. NHS는 1948년 출범 당시 세금으로 재원을 충당해 소득과 국적에 관계없이 모든 영국 거주자에게 원칙적으로 무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이념으로 설립됐다. 78년 역사의 이 제도는 ‘영국 정체성의 일부이자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국가 재정이 악화하면서 정부는 강도 높은 지출 삭감에 나섰고, 의료 부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영국의 실질 의료비 증가율은 1955~2009년 연평균 4.2%에 달했으나, 2010년 이후엔 코로나19 팬데믹 전까지 이 수치를 계속 밑돌았다. 의료 부문에 배정된 정부 예산 증가율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의료 수요가 급증할 때까지 약 10년 동안 둔화했다는 얘기다.

병원은 예산 대부분을 정부에 의존하기 때문에 의료비 삭감은 직접적인 운영난으로 이어졌다. 인력 충원 축소와 임금 억제가 이어지면서 현장 피로감이 누적되었고, 이는 서비스 질 저하로 직결됐다. 최근 몇 년간 영국 전역에서 의료진 파업이 반복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노라 콜턴 런던대(UCL) 교수는 “NHS가 역사적으로 가장 운영이 어려운 국면에 내몰렸다”며 “인력 부족과 저임금 문제로 의료진의 사기 저하가 심각하며, 의료 인프라도 노후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진=AFP)
영국 국민들의 NHS 만족도 역시 급락했다. 영국 싱크탱크 너필드 트러스트 등의 조사에 따르면 2007년에는 NHS에 “만족한다”는 응답자가 51%, “불만족한다”는 응답자는 30% 수준이었다. 그러나 2021년에는 두 비율이 역전됐고, 2024년 조사에서는 불만족 응답이 59%로 만족(21%)의 세 배 가까이 확대했다.

NHS를 이용하지 않고 자비로 민간 병원에서 의료 서비스를 받는 것도 가능하지만, 고액의 비용 부담을 각오해야 한다. 런던 내 민간 산부인과 병원에서 출산하면 최소 1만파운드(약 2000만원)가 필요하다. 보장 범위가 큰 민간보험이 없으면 현실적으로 이용이 어렵다고 닛케이는 설명했다.

집권 노동당은 NHS 개혁을 주요 정책으로 내세웠다. 일부 NHS 기관을 정부 직할로 두고, 디지털 전환과 효율화를 추진해 향후 10년간 의료의 질을 단계적으로 개선한다는 구상이다. 정부는 의료 지출도 확대할 방침이다.

그러나 콜턴 교수는 “정부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며 “민간 자본을 끌어들여 의료 투자를 활성화할 포괄적 구조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닛케이는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의료재정 부담은 선진국 공통의 과제라며, 영국의 NHS 개혁은 이러한 구조적 도전 속에서 지속가능한 해법을 찾기 위한 시험대에 서 있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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