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호황에도 힘 못쓰는 원화…대만·일본과 '닮은꼴'

해외

이데일리,

2026년 2월 13일, 오전 07:11

[이데일리 이정윤 기자] 반도체 호황과 경상흑자에도 한국과 대만, 일본 통화는 웃지 못하고 있다. TSMC와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수출을 끌어올리고 일본도 무역흑자가 이어지고 있지만, 세 나라 통화 가치는 좀처럼 반등하지 못하고 있다. 수출보다 해외투자와 대미투자로 빠져나가는 자본이 더 큰 변수로 자리 잡은 결과다. 환율을 움직이는 힘이 ‘무역’에서 ‘자본 이동’으로 옮겨간 만큼 이런 동조화는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데일리 김정훈 기자]
◇대만달러·원화·엔화, 약세 동조 흐름 뚜렷

12일 국제금융센터, 블룸버그 등에 따르면 대만은 지난해 반도체 수출 급증에 힘입어 8%대 성장률을 기록했다. 대만의 강력한 파운드리 경쟁력을 기반으로 상품·서비스 수출은 지난해 32.2% 증가했고, 1분기 297억달러였던 경상수지 흑자는 3분기 458억달러로 확대됐다. 순수출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8.6% 가운데 6.6%포인트를 기여할 정도로 수출의 힘이 컸다.

하지만 환율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대만 달러는 지난해 6월 말 달러당 29.59대만달러에서 최근 31.56대만달러로 오르면서 6.3% 약세다. 같은 기간 중국 위안화(3.6%), 말레이시아 링깃화(7.3%), 태국 바트화(4.3%)와 달리 약세를 보였고, 한국 원화(-7.1%), 일본 엔화(-6.7%)와 비슷한 흐름을 나타냈다.

한국도 수출 지표만 놓고 보면 흐름은 견조하다. 지난해 연간 수출액은 약 7097억달러로 사상 처음 7000억달러를 넘어섰고, 반도체 수출은 22.2% 증가한 1734억달러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연간 경상수지는 1230억 5000만달러 흑자를 기록해 사상 최대 규모였다. 하지만 원·달러 환율은 1480원을 웃돌면서 원화는 약세를 면치 못했다.

엔화 역시 상황은 비슷하다. 일본은 지난해 경상수지 흑자가 전년보다 11.1% 늘어난 약 31조 8799억엔(약 2084억달러)으로 집계되며 2년 연속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해외 투자 수익과 전자 부품·식품 수출 호조가 흑자를 떠받쳤다. 그럼에도 엔화는 약세 흐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해외투자·대미투자가 만든 환율 동조화

이들 세 통화 약세의 가장 큰 원인은 ‘해외투자’ 확대에 있다. 대만은 저금리와 고령화 속에서 자산이 빠르게 늘었지만 이를 흡수할 국내 금융시장은 제한적이다. 그 결과 생명보험사를 중심으로 해외자산 비중이 급격히 확대됐다.

특히 지난해 3분기 들어 대만에서는 자금 유출이 크게 확대됐다. 2분기 내국인은 해외주식과 채권을 합쳐 70억달러 매도했으나, 3분기에는 160억달러를 매수하며 순유출로 전환됐다. 반면 같은 기간 외국인의 대만 투자는 140억달러에서 53억달러로 급격히 줄었다. 특히 지난해 9월 말 이후 주식시장에서만 139억달러가 순유출되며, 들어오는 자금보다 나가는 자금이 훨씬 많은 구조가 지속됐다.

실제 대만 생보사의 해외자산 비중은 2005년 말 30.6%에서 2022년 10월 71.5%까지 상승했고, 지난해 11월 말에도 67.8%에 달했다. 최근 10년 평균 대만의 장기 국채금리가 0.99%에 불과한 환경에서 해외 채권과 주식으로 자금이 이동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상원 국금센터 외환분석부장은 “대만은 출산률이 낮고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국민 저축률이 높아 자금이 빠르게 쌓인다”며 “하지만 국내 주식·채권시장이 작아 이 자금을 대부분 해외에 투자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고, 이런 흐름은 최근 들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 역시 개인과 기관의 해외투자가 확대되며 비슷한 구조를 보인다. 개인투자자로 일컬어지는 서학개미와 국민연금 등의 해외주식·채권 투자가 늘어나면서 지난해 해외투자 총액은 1143억달러로, 지난해 경상수지 흑자(1230억 5000만달러)에 맞먹는 수준까지 뛰었다. 올해 들어서도 이러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어 원화 약세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미투자 부담 역시 세 나라 통화 약세를 설명하는 핵심 요인이다. 대만은 2500억달러 규모의 대미투자를 추진 중인데, 연간 250억달러 수준으로 집행해도 기존 연간 해외직접투자 규모를 웃돌아 달러가 해외로 빠져나가는 압력이 커진다. 여기에 대만은 올해 1월까지 대미 관세협상이 늦어지면서 불확실성이 길어지고, 외국인이 대만 투자를 꺼리면서 대만달러 약세 압력이 더 커졌다. 한국과 일본도 대미 통상 협상에서 대규모 투자 약속을 내걸었다. 한국은 약 3500억달러, 일본은 약 5500억달러 규모의 미국 투자 계획을 제시했다.

전문가들은 해외투자와 대미투자 구조가 계속 이어지는 한, 원화·대만달러·엔화의 약세 동조화는 쉽게 꺾이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민혁 KB국민은행 이코노미스트는 “한국, 대만, 일본이 아시아 수출국이라는 공통점과 대미투자라는 구조적 요인이 겹쳐, 약세 동조화는 단기적 변동에 그치기보다는 구조적 흐름에 가까워 보인다”고 말했다.

이 부장은 “대만의 대미투자 부담과 생보사 환헤지 청산이 지속되는 한, 반도체 수출이 호조를 지속하더라도 대만 달러화가 약세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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