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 맡겨서는 안 된다. 국가가 직접 집을 지어야 한다.”
지난달 21일(현지시간) 싱가포르에서 공사 중인 고층 아파트 단지 모습. (사진=AFP)
2024년, 싱가포르는 이 시스템을 한 단계 더 진화시켰다. 입지에 따라 HDB를 스탠더드(Standard)·플러스(Plus)·프라임(Prime)으로 분류하고, 각각 다른 보조금과 규제를 적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HDB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싱가포르 HDB 시스템의 토대는 국가의 토지 소유권이다. 싱가포르 국토의 90%는 국가 소유다. HDB 주택은 99년 임대차(leasehold) 방식으로 공급된다. 입주민은 집을 ‘소유’하지만, 토지는 국가 것이다. 이 구조가 투기를 원천 차단하는 핵심 장치다.
여기에 대규모 공급이 더해진다. 싱가포르 정부는 최근 몇년간 매년 1만~2만 호 안팎을 공급해 왔고, 2025~2027년에는 3년 동안 약 5만5000호를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특히 ‘BTO(Build-To-Order)’ 방식으로 수요를 파악한 후 짓기 때문에 공실이 거의 없다. 신청자가 먼저 등록하고, 정부가 그에 맞춰 건설을 시작하는 시스템이다.
가격은 시세보다 훨씬 낮다.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해 중위소득 가구도 구매할 수 있는 수준으로 책정한다. 2024년 기준 4룸(거실 1개, 침실 3개) HDB 분양가는 약 30만~50만 싱가포르달러(약 3억4500만~5억7500만원) 수준이다. 같은 지역 민간 아파트가 100만 싱가포르달러(약 11억5000만원)를 훌쩍 넘는 것과 비교하면 절반 이하다.
투기 방지 장치도 철저하다. HDB는 살기 위한 집이지, 투자 상품이 아니다. 입주 후 최소 5년간 의무 거주(MOP·Minimum Occupation Period)를 해야 하고, 그 이전에는 매매가 불가능하다. 재판매 시에도 HDB 자격을 갖춘 싱가포르 시민과 영주권자 위주로만 팔 수 있다. 일반 외국인에게 직접 파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보조금 주는 대신 의무 거주·가격 상승분 환수
하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HDB 가격이 꾸준히 올랐고, 특히 도심이나 역세권 같은 프라임 입지는 재판매 시장에서 가격이 급등했다. 정부 보조금을 받아 싼 값에 분양받은 뒤, 5년 후 되팔아 시세 차익을 챙기는 사례가 늘어난 것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2024년 10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HDB를 세 등급으로 나누는 새 제도를 도입했다.
일반 지역의 HDB는 ‘스탠더드’로 분류돼 기존 규제를 유지한다. 5년 의무 거주 기간을 채우면 재판매가 가능하다.
역세권이나 인기 지역은 ‘플러스’로 지정된다. 정부가 보조금을 더 많이 지급하는 대신, 의무 거주 기간이 10년으로 늘어난다. 재판매할 때는 일부 보조금을 환수한다.
도심 핵심부나 최고 입지는 ‘프라임’으로 구분된다. 가장 많은 보조금을 받을 수 있지만, 10년 거주 의무와 함께 재판매 시 보조금 일부를 정부에 환수하는 ‘클로백(Clawback·환수)’ 조항이 적용된다. 투기 수익을 제한하되, 자산 형성 자체는 허용하는 절묘한 균형이다.
지난해 12월 9일(현지시간) 싱가포르 도심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시민들이 앤더슨 브리지 위를 오가고 있다. (사진=AFP)
싱가포르 국가개발부(MND) 장관 데스몬드 리(Desmond Lee)는 “HDB는 국민의 집이지, 투자 상품이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국민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기도 하다”면서 “우리의 목표는 투기는 막되, 근면하게 일한 가정이 자산을 형성할 기회는 보장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스탠더드·플러스·프라임 체계는 ‘얼마나 좋은 입지인가’에 따라 보조금과 규제를 차등 적용한다. 입지가 좋을수록 정부가 더 많은 보조금을 주지만, 대신 더 긴 거주 의무와 환수 조항이 따라붙는 구조다.
이는 “좋은 입지의 HDB를 받은 사람이 운 좋게 횡재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다.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되, 과도한 시세 차익은 사회에 환원하도록 설계된 시스템이다.
◇한국에 적용 가능한가
싱가포르 모델을 한국에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다. 국토 면적, 정치 체제, 토지 소유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울 점은 분명하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공공 공급의 압도적 비중이다. 한국의 공공분양은 전체 주택 공급의 20%도 안 된다. 민간이 공급의 80%를 담당하는 구조에서는 정부가 가격을 통제하기 어렵다. 싱가포르는 80% 공공 공급으로 시장 가격 자체를 잡았다.
토지 공개념도 핵심이다. 싱가포르가 투기를 막을 수 있는 이유는 국가가 토지를 소유하기 때문이다. 한국도 역세권 개발, 신도시 조성 시 토지를 국가나 공공기관이 장기 보유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 LH가 땅을 팔아 단기 수익을 내는 구조에서는 싱가포르식 통제가 불가능하다.
플러스·프라임 모델은 서울 역세권에 적용할 만하다. 서울 지하철 2호선, 9호선 역세권의 공공분양은 ‘로또’가 되고 있다. 싱가포르처럼 좋은 입지일수록 더 많은 보조금을 주되, 10년 거주 의무와 시세 차익 일부 환수 조항을 붙이면 어떨까. 투기는 막되, 실수요자에게는 자산 형성 기회를 주는 방식이다.
장기 거주를 전제로 한 설계도 중요하다. 한국 공공주택은 ‘임시 거처’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싱가포르 HDB는 평생 살 집이다. 설계, 커뮤니티, 편의시설 모두 장기 거주를 전제로 만들어진다. 한국도 공공주택을 ‘어쩔 수 없이 사는 곳’이 아니라 ‘선택하고 싶은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공급이 답이다
싱가포르가 주는 가장 큰 교훈은 단순하다. 바로 “공급이 답”이라는 것.
세금을 올려도, 대출을 막아도, 수요는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공급을 늘려야 가격이 안정된다. 그리고 공급 주체가 시장이 아니라 국가일 때, 가격 통제가 가능하다.
물론 싱가포르는 권위주의 체제에서 강력한 토지 공개념을 실현할 수 있었다.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이고, 사유재산권 보호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똑같은 방식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방향은 같을 수 있다. 역세권 공공주택을 대폭 늘리고, 토지는 공공이 보유하며, 입지에 따라 보조금과 규제를 차등 적용하는 것. 이것이 싱가포르가 60년간 실험하며 찾아낸 ‘작동하는 공식’이다.
지난달 21일(현지시간) 싱가포르에서 언덕 위에 선 사람들이 고층 주거용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AF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