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판결의 본질은 세율이 아니다. 권력의 ‘속도’다. IEEPA 체제에서 대통령은 거의 즉각적으로 관세를 올리고 내릴 수 있었다. 의회 승인도, 장기간의 행정 절차도 필요 없었다. 그 기동성이 곧 협상력이었다. 상대국에는 선택이 단순했다. 양보하거나, 경제적 충격을 감수하거나. 불확실성은 그 자체로 압박 수단이었다. 미국 기업 역시 정책의 급변 가능성을 전제로 공급망과 투자 계획을 설계해야 했다. 대법원 판결은 이 속도를 늦췄다. 이제 관세는 더욱 명확한 법적 근거와 부처 간 협의, 절차적 정당화를 요구받는다. 기업의 소송도 뒤따를 전망이다. 관세 부과는 가능하지만 과거처럼 즉흥적이고 전면적인 압박은 어려워졌다. 트럼프는 여전히 관세를 쓸 수 있지만 한층 제약된 틀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
이 지점에서 정책은 방향을 바꾼다. 하나의 강력한 긴급권한 대신 122조, 301조, 232조 등 여러 법률을 병행하는 ‘다층적 관세 체계’가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특정 품목에는 안보를, 특정 국가에는 불공정 무역을, 전반적 적자에는 임시 조치를 적용하는 방식이다. 단일 칼날이 무뎌지면 여러 칼을 동시에 드는 구조다. 법적 다툼은 늘겠지만 정책의 지속성은 오히려 강화할 수 있다.
국제사회는 이를 면밀히 계산하고 있다. 유럽은 무역협정 비준을 멈추고 상황을 재검토한다. 각국 정부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치적 동력, 의회 구도, 사법부의 태도를 함께 따진다. 관세는 경제 정책이지만 동시에 정치적 신호다. 미국 대통령이 어디까지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잣대이기도 하다.
한국의 통상 환경도 단순하지 않다. 겉으로는 15%라는 숫자를 유지한다. 그러나 법적 공방과 추가 불공정 무역 조사 가능성, 중간선거 등 정치 일정이 겹치면 불확실성은 언제든 커질 수 있다. 자동차와 철강처럼 기존 관세가 유지되는 품목까지 고려하면 산업별 리스크는 더 복합적이다. 숫자 하나로 안도할 수 없는 구조다.
관세는 법정에서 한 번 멈췄다. 그러나 권력은 제동을 걸어도 멈추지 않는다. 속도를 잃은 대신 경로를 넓힐 것이다. 이번 판결은 관세의 종말이 아니라 전술의 변경이다. 시장이 계산해야 할 것은 숫자가 아니라 방향이다. 세율은 유지돼도 정책의 움직임은 유동적이다. 다음 충돌은 세율이 아니라 미국 대통령의 힘이 또다시 어디까지 미치는지를 가늠하는 시험의 장이 될 가능성이 크다. 관세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더 복합적이고 더 계산적인 국면으로 들어서고 있다. 우리 정부와 기업은 최적의 결과를 도출해야하는 부담감을 더 떠안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