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닫히면 또 닫힌다”…호르무즈 봉쇄, 에너지 질서 재편하나

해외

이데일리,

2026년 4월 07일, 오전 08:12

[뉴욕=이데일리 김상윤 특파원]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글로벌 에너지 질서를 뒤흔드는 구조적 충격으로 확산되고 있다. 전 세계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 물동량의 약 20%가 통과하는 핵심 수송로가 사실상 차단되면서 공급망 불안이 현실화됐고, 각국의 에너지 전략과 정책 방향까지 근본적으로 재편되는 양상이다.

지난 2월 28일 시작된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으로 중동 전쟁이 격화되며 글로벌 에너지 및 금융시장에 충격을 주고,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사실상 봉쇄하면서 국제유가가 급등한 여파로 연료 공급 차질이 나타나고 있다. (사진=AFP)
이번 사태는 2020년대 들어 세 번째 대형 에너지 충격으로 평가된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수요 급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공급망 재편에 이어, 이번 이란 전쟁이 다시 한 번 글로벌 에너지 시스템의 취약성을 드러냈다는 분석이다.

특히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면서 중동산 원유와 LNG의 글로벌 공급망이 직접 타격을 받았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하루 1200만 배럴 이상의 공급 차질이 발생한 ‘사상 최대 에너지 공급 충격’으로 규정했다.

이번 위기의 본질은 ‘수송로 리스크의 상시화’다. 영국 채텀하우스의 닐 퀼리엄 연구원은 “호르무즈는 한 번 닫혔고 앞으로도 반복적으로 봉쇄될 수 있다”며 “글로벌 경제에 구조적 위협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에너지 흐름이 특정 해협에 집중된 구조 자체가 리스크로 부각된 것이다.

실제로 이번 사태는 중동 산유국 간 ‘지리적 격차’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는 파이프라인과 대체 수출 경로를 통해 일부 우회가 가능했지만, 이라크와 쿠웨이트는 해협 의존도가 절대적이어서 수출이 급감하는 타격을 입었다. 이는 에너지 시장에서 ‘지리=권력’이라는 공식을 재확인시킨 사례로 평가된다.

사우디는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구축한 동서 파이프라인을 통해 홍해로 원유를 수송하며 위기 대응 능력을 입증했다. 반면 대체 경로가 없는 국가들은 공급 차질이 곧바로 재정 충격으로 이어졌다. 이번 위기는 에너지 안보가 단순한 생산량이 아니라 ‘수송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각국 정부는 즉각 대응에 나섰다. 주요 소비국들은 비축유 방출과 에너지 절약 권고 등 단기 대응에 나서는 한편, 중장기적으로는 공급망 다변화 전략을 재검토하고 있다. 특히 아시아 국가들은 중동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LNG 스팟 구매 확대와 공급선 다변화에 나서는 모습이다.

동시에 에너지 정책 전반의 재설계 움직임도 본격화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원자력 발전 투자에 대한 금융 지원을 확대하며 기존 탈원전 기조를 일부 수정하고 있고, 일본과 대만 등도 원전 재가동 논의를 재점화하고 있다.

미국 국무부 에너지 담당 차관보를 지낸 제프리 파이엇은 “에너지 안보 문제가 지금처럼 심각했던 적은 없었다”며 “걸프 지역 에너지를 당연하게 여겼던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재생에너지 확대 역시 이번 전쟁이 촉발한 핵심 변화 중 하나다. 중국은 전쟁 초기부터 재생에너지 전환과 비축 확대 필요성을 강조하며 대응에 나섰고, 주요국들도 태양광과 풍력 중심의 전력 체계 전환을 가속화하고 있다.

특히 중국은 높은 전력화율과 전기차 보급 확대, 재생에너지 중심 전력 구조 덕분에 상대적으로 충격을 덜 받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화석연료 의존도가 낮을수록 지정학 리스크에 대한 내성이 높아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중동 산유국들 또한 변화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UAE, 오만 등은 태양광과 그린수소 프로젝트를 확대하며 석유 의존도를 낮추려는 전략을 추진 중이다. 이는 단순한 탄소 감축이 아니라 공급망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에너지 안보 전략으로 해석된다.

다만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새로운 의존 구조가 형성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유럽 일부 정치권에서는 재생에너지 확대가 중국산 장비와 기술에 대한 의존도를 높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또 다른 형태의 공급망 리스크를 경고하고 있다.

유럽의회 대이란 관계 대표단 부위원장인 바르트 그루트후이스 의원은 “우리는 에너지 인프라에서 중국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대한 ‘완전한 의존’을 만들어가고 있다”며 “이는 새로운 의존성과 새로운 문제를 동시에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태양광 패널과 전력망 장비 등 핵심 기술이 중국에 집중된 구조를 문제로 지적하며 “화석연료 의존에서 벗어나려다 또 다른 전략적 의존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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