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이데일리 김상윤 특파원, 방성훈 기자] 이란 전쟁이 촉발한 에너지 충격이 단순한 가격 급등을 넘어 글로벌 에너지 질서를 뒤흔들고 있다. 전 세계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의 약 20%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차단되며 공급망은 단숨에 흔들렸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와 주요 생산시설 타격이 동시에 발생하면서 각국은 ‘저비용·효율’ 중심 전략에서 ‘안정성·안보’ 중심으로 ‘에너지 믹스’를 재편하는 흐름이 뚜렷해지고 있다. 이란전 발발 이전까진 원유 수급(양)에 따라 가격이 정해졌다면 이제는 ‘안보 리스크’라는 보이지 않는 비용이 에너지 가격의 기본값에 포함되며 가격 결정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이데일리 김일환 기자]
호르무즈 해협의 지정학적 리스크는 과거에도 가스전 일대가 타격을 받으면서 시장은 ‘운송 차질’을 넘어 ‘생산 차질’ 가능성까지 반영하기 시작했다. 국제 에너지 업계에서는 이번 사태를 에너지 공급망 전체가 지정학에 종속돼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시킨 사건으로 지목했다. “설마 호르무즈 해협을 닫겠어”라는 믿음이 깨지면서 전 세계는 에너지 안보를 각국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격상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 국무부 에너지 담당 차관보를 지낸 제프리 파이엇은 “걸프 지역 에너지를 당연하게 여겼던 시대는 끝났다”고 진단했다.
에너지가 국가 안보로 격상하면서 에너지 전환도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일 태세다. 단기적으로는 공급 부족을 메우기 위해 석탄 등 화석연료 사용이 다시 늘고 있다. 재생에너지 확대에 ‘올인’했던 유럽연합(EU)은 에너지 가격 급등과 공급 불안에 대응해 탄소가격제, 에너지 효율 규제, 재생에너지 확대 목표 등 주요 정책을 재조정 대상에 올렸다. 유럽 일부 국가는 전력난을 막기 위해 석탄발전 재가동까지 검토하고 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은 최근 “유럽이 원자력 산업을 축소한 것은 전략적 실수였다”고 지적했다.
대만은 탈원전 정책에서 선회해 원전 활용 가능성을 공식 언급했고 대만전력공사는 다음 달부터 마이랴오 발전소의 석탄 발전 전력을 구매하기로 했다. 일본은 원전 재가동을 위한 제도 정비에 착수했다. 한국 역시 정비 중인 원전의 조기 가동을 추진 중이다. 미국은 세제 혜택과 금융 지원으로 원전 산업을 뒷받침하고 있으며 중국은 설비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다만 원전 확대는 시간과 비용이라는 제약이 있다. 신규 건설과 재가동에는 수년이 소요돼 단기적인 공급 충격을 해소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데일리 김정훈 기자]
이 때문에 재생에너지의 전략적 가치도 포기할 수 없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워싱턴포스트(WP)는 각국 정부가 화석연료 공급 불안에 대응해 재생에너지 전환을 서두르면서, 태양광·배터리·전기자동차 글로벌 공급망을 장악한 중국이 최대 수혜자로 부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유럽의회 대이란 관계 대표단 부위원장인 바르트 그루트후이스 의원은 “우리는 에너지 인프라에서 중국 기술에 대한 완전한 의존을 만들어가고 있다”며 “화석연료 의존에서 벗어나려다 또 다른 전략적 의존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