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로이터
◇트럼프의 관세·최혜국 약가 정책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브랜드 의약품에 최대 100%의 관세를 부과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약가 인하 합의를 맺지 않은 제약사가 타깃이어서 당장의 타격은 제한적이다. 그러나 ING 헬스케어 애널리스트 디데리크 스타디그는 이번 관세가 “유럽이 경쟁력을 갖추도록 하는 또 하나의 압박 계기”라고 짚었다.
더 근본적인 위협은 ‘최혜국 약가(MFN)’다. 미국 정부가 자국 내 의약품 가격을 다른 고소득 국가들의 최저 수준에 맞추도록 강제하는 정책이다. 2024년 란드(RAND)연구소에 따르면 미국은 다른 33개 고소득 국가보다 의약품 가격이 약 3배 높은 최고 수익 시장이다. 이 마진이 줄어들면 제약사들의 글로벌 전략 전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스타디그 애널리스트는 미국의 최혜국 약가 위협이 “제약사들에게 유럽 정부·규제당국과의 협상에서 쓸 수 있는 카드를 쥐여줬다”고 분석했다. 유럽에서 낮은 가격으로 출시하면 그 가격이 미국 약가의 기준선이 될 수 있어서다. 제약사로서는 유럽 출시를 미루겠다고 압박함으로써 유럽 정부로부터 더 높은 약가를 끌어낼 협상 카드가 생긴 셈이다.
실제로 이미 미국에서는 출시됐지만 유럽에는 나오지 않는 신약들이 존재한다. 상대적으로 낮은 약가 때문이다. 최혜국 약가 정책이 본격화되면 이 현상은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맥킨지 시니어 파트너 그렉 그레이브스는 지난 2월 CNBC에 “내가 함께 일하는 모든 기업들이 이 선택지들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고민의 결과는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 스타디그는 “고부가가치 의약품에서는 유럽 출시가 지연될 것”이라며, 변화가 없을 경우 “투자가 유럽에서 미국으로 점진적으로 재배치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럽과 미국의 제약 연구개발(R&D) 투자 비중 변화 (단위: %, 자료: ING·CNBC)
또 다른 위협은 중국에서 왔다. 10년 전 중국이 개발한 신약 후보물질은 글로벌 신약 파이프라인의 4%에 불과했다. 지금은 거의 30%에 달한다고 ING는 밝혔다. 글로벌 대형 제약사들이 차세대 블록버스터 신약을 찾아 중국 바이오테크와의 라이선싱 계약에 나서고 있다. 피치북은 지난 1월 보고서에서 “지정학적 마찰이 커지는 상황에서도 중국 바이오파마의 우위는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보코니 대학교 연구진은 “미국이 유럽연합보다 R&D 유치와 유지에 일관되게 더 성공적이며, 중국은 전 세계에서 해외 R&D의 최대 순수혜국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유럽의 구조적 약점
유럽의 문제는 외부 압박만이 아니라고 CNBC는 지적했다. EU 회원국 27개국의 서로 다른 규제 환경, 파편화된 자본시장, 국가별로 제각각인 의약품 급여(상환) 정책이 기업들의 발목을 잡아왔다. ING에 따르면 EU 바이오테크 기업들은 미국 기업들에 비해 5~10배 적은 벤처투자를 유치하는 데 그친다.
‘경고등’은 이미 켜진 상태다. 옥스퍼드·케임브리지라는 세계적인 연구기관을 보유한 영국이 대표 사례로 꼽힌다. 지난해 아스트라제네카·일라이 릴리·MSD는 생명과학 환경의 문제를 이유로 영국 투자를 잇달아 보류하거나 취소했다. 스타디그는 “영국이 광산 속 카나리아였다”고 표현했다. 영국이 유럽 전체에 닥칠 위기를 가장 먼저 경험한 나라라는 의미다.
우리 제약·바이오 기업들 역시 무관하지 않다. 삼성바이오로직스(207940)·셀트리온(068270) 등 위탁개발생산(CDMO) 기업들은 빅파마들이 투자를 미국으로 집중시킬 경우 수주 포트폴리오 구성 전략을 재검토해야 할 수 있다. 미국 내 생산 압박이 강해질수록 비미국계 CDMO의 경쟁 환경은 복잡해진다.
유럽제약산업협회(EFPIA) 나탈리 몰 사무총장은 “제약 분야 지출을 늘리고 정부의 환수금과 세금을 없애야 한다. 이러한 정책이 기업을 EU에 붙잡아두고 의약품 접근성을 높이는 데 핵심”이라고 CNBC에 강조했다. 제약 산업이 없다면 유럽은 1300억 유로(약 226조5000억원) 무역 흑자 대신 880억 유로(약 153조3500억원) 적자를 기록할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유럽 주요 제약사들의 지역별 매출 분포 (단위: %, 자료: 각사 공시, CNBC) *지역별 매출을 공개한 가장 최근 기준, 바이엘·로슈는 제약 부문만 포함, 독일 머크는 3분기 기준 및 전 사업부 매출, 바이엘·독일 머크의 '미국 매출'은 북미 매출 기준
암울한 지표 속에서도 반전의 조짐은 있다. EU가 제안한 바이오테크법(Biotech Act)은 규제 간소화와 임상시험 신속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공급 차질을 계기로 발의된 핵심의약품법(Critical Medicines Act)도 추진 중이다. 스페인은 정부 지원을 통해 임상연구 허브로 부상하며 성공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국립보건원(NIH) 예산 삭감과 강화된 비자 규제가 역설적으로 유럽에 기회를 열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mRNA(메신저 리보핵산) 등 신흥 분야에서 미국이 주춤하는 사이 유럽이 선점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이다.
스타디그는 “유럽 차원에서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면서도 핵심 문제를 짚었다. 그는 “각국 정부가 아직 이 긴박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며 “국가 규제가 만들어내는 내부 장벽으로 우리 스스로 발등을 찍고 있다”고 했다.
결국 변수는 회원국들의 속도다. EU 집행위원회가 방향을 잡더라도, 27개 회원국의 규제·지출 정책이 함께 바뀌지 않으면 투자의 무게중심은 계속 미국과 중국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