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사진=AFP)
◇“에너지 원조 넘어 공급망 파트너로”
다카이치 총리는 이번 지원의 성격을 단순한 에너지 원조가 아닌 공급망 재편 전략으로 규정했다. 그는 “일본은 중동 상황으로 어려움을 겪는 국가들에 단순히 원유를 제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복원력 있는 에너지·핵심 광물 공급망을 구축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란 전쟁 여파로 원유 가격이 급등한 가운데, 재정 여력이 부족한 동남아 국가들이 미국 등 대체 공급국으로부터 원유를 안정적으로 구매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핵심이다.
◇동남아 공급망 흔들리면 일본도 직격
동남아시아는 글로벌 제조업의 핵심 원료 공급 기지다. 원유에서 추출하는 나프타를 기반으로 플라스틱, 섬유, 의약품 용기 등 다양한 산업재를 생산한다. 이란 전쟁이 단순히 연료 문제를 넘어 글로벌 제조업 전반의 위기로 번지고 있는 이유다.
일본 역시 이미 나프타 부족 현상을 겪고 있다. 일본의 위생도기 제조사 토토(Toto)는 이번 주 나프타 유래 용제 수급이 막히자 조립식 욕실 유닛의 신규 주문을 전면 중단한다고 밝혔다.
의료 분야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이달 초 여러 환자·의사 단체는 일본 후생노동성에 석유 부산물 생산 차질로 위험에 처한 의료기기 공급망을 파악해달라고 촉구하는 공동 청원서를 제출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아시아의 연료 부족과 공급망 차질은 아시아에서 일본으로의 의료용품 조달을 저해할 것”이라며, 일본이 혈액투석 장비·폐액 용기·수술용 장갑 등을 아시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고 직접 언급했다.
일본 기후현 도키시에 위치한 토토 공장에서 근로자가 작업을 하고 있다.(사진=AFP)
일본은 세계 최대 수준의 전략 석유 비축량을 보유한 나라다. 국내 수요 254일치에 달하는 비축량을 지난달부터 방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업계 전문가들은 이 비축분이 일본 내 정유사 전용으로 설계돼 있어 외국에 직접 공급하기 어려운 구조적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번에 발표한 100억 달러 재정 지원은 바로 이 한계를 우회하기 위한 수단이다. 현금 지원을 통해 동남아 국가들이 스스로 원유를 조달하게 함으로써 역내 공급망을 간접적으로 보호하는 방식이다.
◇한국도 무관하지 않다
동남아시아는 한국의 의료기기, 석유화학 제품 등의 생산 및 수출 공급망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프타를 원료로 하는 에틸렌·프로필렌 등 기초 화학 원료 생산이 차질을 빚을 경우, 우리나라 석유화학 업계와 의료기기 제조업체들도 원부자재 수급 압박에 직면할 수 있다. 일본의 이번 선제적 대응이 한국 정부와 산업계에도 공급망 리스크 점검의 계기가 될지 주목된다.
이란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아시아 각국의 공급망 재편 경쟁은 더욱 빨라질 전망이다. 일본의 이번 움직임이 역내 자원 외교의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을지, 그리고 미국 등 주요 산유국이 아시아의 수요 급증에 어떻게 반응할지가 다음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김정관(왼쪽 두번째)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석탄회관에서 열린 '원유·나프타 수급 대응 점검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이데일리 방인권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