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와 균열…석유 전략 충돌이 근본 원인
수하일 알 마즈루이 UAE 에너지장관은 이번 결정을 “장기 전략과 경제적 비전에 기반을 둔 주권적 선택”이라고 밝혔다. 시장과 전문가들은 이를 단순한 정책 조정이 아닌 구조적 변화의 신호로 해석한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소셜미디어 페이스북에 “UAE의 탈퇴는 사우디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자적 지정학 전략을 본격화하는 움직임이다”며 “미국·이스라엘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탈걸프’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데일리 김일환 기자]
이 같은 균열은 석유 정책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사우디는 감산을 통해 공급을 조절하고 유가를 방어하는 전략을 유지했지만 UAE는 생산 확대를 통해 시장 점유율과 수익을 동시에 늘리는 전략을 선호해왔다. 대규모 투자로 생산능력을 빠르게 끌어올린 UAE로서는 OPEC의 생산 쿼터 체제가 오히려 성장 제약으로 작용했다는 불만이 누적돼 왔다.
마이클 헤이그 소시에테제네랄 원자재 리서치 책임자는 “UAE는 생산비가 낮고 생산능력 확대에 지속적으로 투자해온 국가다”며 “시장 상황에 맞춰 생산을 조정할 수 있는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유인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UAE는 하루 200만~300만 배럴 수준의 생산 능력을 보유한 핵심 산유국으로, 탈퇴 이후에는 생산 확대를 통한 수익 증대 전략을 본격화할 가능성이 크다.
이번 탈퇴는 OPEC의 구조적 약화를 가속하는 요인으로도 평가된다. 호르헤 레온 라이스타드에너지 지정학 분석 책임자는 “UAE의 이탈은 OPEC가 시장을 관리하는 능력을 지탱해온 핵심축을 약화시키는 사건이다”며 “조직은 구조적으로 더 취약해질 것이다”고 지적했다. 사우디와 함께 여유 생산능력을 보유한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였던 UAE가 빠지면서 OPEC의 가격 조정 기능이 약화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이번 결정의 배경에는 이란 전쟁이라는 지정학적 충격이 자리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전 세계 원유 수송의 약 20%가 영향을 받는 상황에서 OPEC가 내부 이견으로 신속한 대응을 하지 못하면서 UAE가 기존 협력 체제의 한계를 체감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인 교수는 “UAE는 이번 전쟁에서 이란의 미사일과 드론 공격을 직접 경험하면서 걸프 집단 안보 체제에 대한 회의가 커졌다”며 “결국 미국 안보 우산에 더 깊이 편입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UAE의 외교·안보 축은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이스라엘과의 군사 협력 확대, 방공 시스템 지원, 드론 기술 협력 등이 진행되며 아브라함 협정 기반의 안보 네트워크가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모습이다. 이는 단순한 외교 관계를 넘어 군사·기술 협력까지 확장되는 흐름으로 중동 지역 안보 구조의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동시에 UAE는 인공지능(AI) 인프라 구축에서도 미국 기술 체계 편입을 가속하고 있다. 과거 중국 기술과의 협력을 병행하던 전략에서 벗어나 미국 중심 기술 질서에 더 깊이 결속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금융 측면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UAE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와 달러 통화스와프를 위한 비공식 협의를 진행한 것은 단순한 유동성 확보를 넘어 미국 금융 질서와의 연결을 강화하려는 전략적 포석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막대한 외환보유액과 국부펀드를 보유한 UAE가 굳이 통화스와프를 추진하는 배경에는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응하는 동시에 금융 안전망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깔렸다는 분석이다.
이 같은 변화는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힘의 균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일부 분석에서는 베네수엘라 원유가 사실상 미국 영향권에 들어간 상황에서 UAE까지 가세하면 미국 중심의 에너지 질서가 한층 강화되는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OPEC 중심의 전통적 카르텔 구조가 점차 약화하는 흐름과 맞물려 새로운 시장 질서 형성을 예고하는 신호로 해석된다.
◇중장기적 시장 변동성 확대…‘가격 전쟁’ 가능성도
단기적으로 유가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전쟁에 따른 공급 차질이 이미 가격에 상당 부분 반영된 상태에서 UAE 탈퇴 자체는 추가 상승 요인으로 작용하지는 않는 모습이다. 실제로 국제 유가는 발표 이후에도 배럴당 100달러 안팎에서 등락을 반복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흐름을 이어갔다.
다만 중장기적으로는 시장 변동성이 확대할 가능성이 크다. OPEC의 조정 기능이 약화하면 공급 불균형을 완충할 장치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전쟁 종료 이후 공급이 정상화되는 국면에서는 억눌려 있던 생산 물량이 시장에 한꺼번에 풀리면서 주요 산유국 간 점유율 경쟁이 본격화될 가능성이 있다.
이 과정에서 사우디와 UAE, 미국 셰일업체 등이 동시에 증산에 나설 때 공급 과잉이 발생하며 유가가 급락하는 ‘가격 전쟁’ 시나리오로 이어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과거에도 산유국 간 점유율 경쟁이 격화되면 감산보다는 증산이 선택되며 가격이 급락한 사례가 반복된 바 있다. 케플러(Kpler)의 호마윤 팔락샤히 선임 애널리스트는 “이번 결정은 OPEC에 가해진 가장 큰 충격 중 하나다”며 “조직이 현재 형태로 유지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고 말했다.
◇“韓 기회…플랜트 수주 확대와 수급 안정 두 마리 토끼
이번 결정이 한국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내 정유 업계에선 UAE의 원유 증산과 수급 개선 효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며 실제 증산으로 이어진다면 원유 수입국인 우리로선 유가 하락과 수급 안정화를 모두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UAE 역시 증산을 위한 플랜트 확장이 필요한 데 국내 건설 수주로 이어질 수 있고 원유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곳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선택지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UAE와 한국의 우호적인 관계를 고려해보면 UAE가 OPEC를 탈퇴하는 것이 한국으로선 공급선을 다변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미래에너지융합학과 교수는 “UAE가 원유를 증산하면 국제유가가 떨어지는 만큼 중장기적으로 한국의 에너지 수입 비용을 절감하고 도입 유연성을 높이는 긍정적 촉매제가 될 수 있다”며 “특히 한국은 UAE와 특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는 만큼 UAE가 증산을 추진하면 우리의 현지 플랜트 건설 수주 기회도 늘어날 것이다”고 말했다.
김진수 한양대 자원환경공학과 교수는 “한-UAE가 우호 관계인 만큼 국내 기업이 현지 인프라 개발에 참여하거나 국제공동비축을 확대하는 등 직·간접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다만 “아직 호르무즈 해협 수송이 불안하고 파이프라인 우회 수송 물량에도 한계가 있는 만큼 UAE가 증산하더라도 현 위기 상황에서의 영향은 제한적이다”며 “비OPEC 국가의 생산능력이 향상돼 OPEC의 영향력·결속력이 과거 같지 않다지만 UAE와 사우디 등 다른 중동 산유국과의 긴장이 커질 수 있다는 점에선 오히려 잠재적인 리스크가 될 여지도 있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