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정상들, 러시아 텃밭 아르메니아 집결…사상 최대 정상회의

해외

이데일리,

2026년 5월 04일, 오후 03:06

[이데일리 방성훈 기자] 유럽연합(EU) 정상들이 사상 최대 규모 회의 개최를 위해 아르메니아에 집결하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인구가 300만명 미만인 작은 국가지만, 옛 소련 연방 국가이자 한때 러시아의 핵심 동맹국이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는 진단이다. 러시아 영향권에 깊이 묶여 있던 아르메니아가 EU 진영으로 빠르게 기울고 있다는 뜻으로 읽혀서다.

4일(현지시간)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아르메니아 예레반에서 열리는 제8차 유럽정치공동체(EPC)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도착하고 있다. (사진=AFP)
4일(현지시간) BBC방송 등에 따르면 이날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에서는 30여개국 유럽 정상들이 참석하는 제8차 유럽정치공동체(EPC) 정상회의가 열린다. EPC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2022년 10월 범유럽 차원의 소통·협력 강화를 위해 출범한 ‘EU+알파 정상회의’로, EU 27개국과 영국·튀르키예·노르웨이 등 40여개국이 참여한다. 특히 이번 회의에는 캐나다 정상이 비(非)유럽국 정상으로는 처음 참석해 더욱 눈길을 끌고 있다.

5일에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이 참석하는 첫 EU·아르메니아 정상회의도 개최된다.

아르메니아는 그동안 러시아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 중 하나로 꼽혀온 나라다. 러시아가 주도하는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회원국이며, 자국 영토에 러시아군 기지도 두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도 높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달 1일 니콜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러시아는 아르메니아에 1000㎥당 177.50달러에 가스를 팔지만 유럽에서는 같은 양이 600달러”라며 “차이가 크고 또 상당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처럼 아르메니아는 최근 러시아와 EU 양쪽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러시아·이란·튀르키예가 맞물리는 코카서스 지역의 전략 요충지인 데다, 유럽과 중동·아시아를 잇는 물류·에너지 회랑이 통과하기 때문이다.

러시아 영향권에 깊이 묶여 있던 아르메니아의 전략적 행보가 EU 쪽으로도 뻗어나가게 된 결정적 계기는 2023년 아제르바이잔과의 전쟁이었다. 아제르바이잔이 전격 군사작전으로 분쟁지역인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장악하고 10만명 이상의 아르메니아계 주민을 추방했으나, 현지에 평화유지군을 두고 있던 러시아는 사실상 방관했다. 사르기스 한다냔 아르메니아 의회 외교위원장은 BBC에 “우리가 속한 안보 체제가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대신 EU가 안보 공백을 메우기 시작했다. EU는 2022년 양국 국경 인정을 중재하고 민간 감시단을 파견했다. 한다냔 위원장은 “EU의 물리적 존재감이 우리 국민의 인식을 바꿨다”며 “EU와 더 가까운 관계를 원하는 대중적 요구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아르메니아는 지난해 3월 의회에서 EU 가입 절차 개시 법안을 통과시켰고, 같은 해 8월에는 미국 백악관에서 아제르바이잔과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러시아는 아르메니아의 친(親)EU 행보에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달 파시냔 총리에게 “EU와 EAEU 양쪽 관세동맹에 동시에 속하는 것은 정의상 불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이번 정상회의를 며칠 앞두고는 아르메니아산 광천수 수입을 금지하기도 했다.

이밖에 친EU 발언을 한 고위 관리가 나오거나 브뤼셀을 방문하는 시점에 아르메니아 화물차들이 조지아·러시아 국경에서 통관이 막혀 발이 묶이거나, 정부 사이트를 마비시키겠다는 해커들의 위협이 잇따랐다고 BBC는 전했다.

러시아의 압박이 거세지자 EU도 적극 대응하고 나섰다. 지난달 21일 향후 2년간 아르메니아에서 러시아발 허위정보·사이버공격·불법 자금 흐름에 대응할 새로운 민간 임무단 파견을 승인했다. 오는 6월 아르메니아 총선을 앞둔 조치다.

다만 아르메니아의 EU 가입 시점이나 안보 공약, 러시아산 가스 대체 방안 등 구체적 약속은 아직까지 없는 상태다. 이에 러시아와 서방 사이에서 아르메니아의 줄타기가 끝나려면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평가도 나온다.

추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