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터크먼 뉴욕증권거래소(NYSE) 트레이더가 NYSE 트레이딩 플로어에서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AFP)
S&P500과 나스닥지수는 최근 사상 최고치를 잇달아 갈아치웠지만 이날은 상승 동력이 급격히 약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AI 랠리를 이끌었던 반도체주가 급락하면서 투자심리가 빠르게 냉각됐다.
◇급등했던 반도체株…차익매물 쏟아져
필라델피아 반도체지수는 3% 급락했다. 최근 6주 동안 약 70% 가까이 폭등했던 반도체주에 과열 경고음이 커진 가운데 인플레이션 우려와 금리 상승이 겹치면서 차익실현 매물이 집중됐다.
전날 S&P500과 나스닥지수 사상 최고치 경신을 주도했던 메모리 반도체 업체 마이크론 테크놀로지는 이날 3.6% 하락했다. 마이크론은 메모리칩 슈퍼사이클 기대감 속에 지난주에만 37% 넘게 급등했고 최근 한 달 상승률도 53%에 달했다.
AMD, 브로드컴은 각각 2.3%, 2.1% 하락했고 퀄컴은 무려 11.5% 급락했다. AMD는 최근 한 달간 74% 이상 상승했고, 퀄컴 역시 같은 기간 39% 넘게 오른 상태였다. 인텔 역시 6.8% 급락했다.
시장에서는 실적 시즌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투자자들의 관심이 다시 기업 실적보다 밸류에이션과 거시경제, 지정학 리스크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제이 햇필드 인프라캡 최고경영자(CEO)는 “실적 시즌에는 탐욕이 시장을 움직이지만 이후에는 공포가 나타난다”며 “시장이 당분간 횡보하거나 조정을 받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브렛 켄웰 이토로(eToro) 투자전략가도 “실적 기대를 기반으로 한 강력한 랠리 이후 증시는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갈 필요가 있다”며 “고용시장과 경제는 아직 안정적이지만 높아지는 인플레이션과 연준의 정책 불확실성이 시장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번 시장 충격의 핵심은 결국 유가다. 미국과 이란 간 휴전이 붕괴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국제유가는 다시 급등했다. 이날 뉴욕상품거래소에서 6월 인도분 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은 전장 대비 4.19% 오른 배럴당 102.18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ICE선물거래소에서 7월 인도분 브렌트유 선물도 3.42% 상승한 배럴당 107.77달러에 마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과 이란 간 한 달간 이어진 휴전 상태에 대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취약하다”며 “생명 유지 장치에 의존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시장 불안이 커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이 제시한 역제안을 “쓰레기 같은 요구(garbage)”라고 비판했다. 이란은 미국 측에 전쟁 배상금 지급과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 인정, 동결 자산 해제, 경제 제재 철폐 등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에서는 호르무즈 해협 불안이 장기화할 경우 에너지 가격 상승이 단순 유가 급등에 그치지 않고 미국 경제 전반의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확산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원유 해상 물동량의 약 20%가 지나가는 핵심 에너지 수송로다.
브렌트유 가격 추이 (그래픽=CNBC)
실제 이날 발표된 물가 지표는 시장 우려를 더욱 키웠다. 이란 전쟁 여파로 국제유가가 급등한 가운데 식료품과 주거비, 항공료까지 동반 상승하면서 인플레이션 압력이 다시 확대되는 모습이다.
미 노동부에 따르면 4월 CPI는 전년 동기 대비 3.8% 상승했다. 이는 다우존스가 집계한 시장 예상치(3.7%)를 웃도는 수치로, 2023년 이후 가장 높은 상승률이다.
전월 대비 상승률은 0.6%를 기록했다. 이는 3월 상승폭과 같은 수준이다.
변동성이 큰 식품·에너지를 제외한 근원 CPI는 전월 대비 0.4%, 전년 동기 대비 2.8% 상승했다. 시장 예상치는 각각 0.3%, 2.7%였다.
근원 CPI는 연준이 중시하는 기조적 물가 흐름을 보여주는 지표다. 시장은 최근 국제유가 급등 영향으로 헤드라인 CPI 상승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근원 CPI까지 예상치를 웃돈 점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휘발유와 식료품 가격 상승세가 두드러졌다. 에너지 가격 상승은 단순히 주유비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항공료와 식료품, 물류비 등 경제 전반으로 파급되고 있다.
물가 상승률이 임금 상승률을 웃돌면서 소비자들의 실질 구매력이 다시 악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날 함께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물가 상승을 반영한 미국의 시간당 실질임금은 전년 대비 0.3% 감소했다. 실질임금이 감소한 것은 3년 만에 처음이다.
토머스 마틴 글로벌트인베스트먼트 선임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CNBC 인터뷰에서 “눈사태 수준은 아니지만 물가가 꾸준히 위쪽으로 움직이고 있다”며 “중동 갈등이 장기화하고 미국과 이란 간 협상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인플레이션 압력은 계속 쌓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휘발유 가격과 생활물가가 계속 오르면 점점 더 많은 소비자들이 압박을 받게 될 것”이라며 “소비자들의 어려움이 지속될 가능성이 큰 환경이 형성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제이 햇필드 CEO 역시 “유가가 떨어지지 않는 한 인플레이션은 개선되기 어렵다”며 “이는 역사적으로 반복돼온 흐름”이라고 지적했다.
미 소비자물가 상승률(전년대비) (그래픽=트레이딩 이코노믹스)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면서 채권시장도 크게 흔들렸다. 미국 2년물 국채금리는 전 거래일 대비 4.7bp(1bp=0.01%포인트) 오르며 4%에 근접했다. 이는 지난해 6월 이후 최고 수준이다. 시장에서는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인하 기대가 사실상 사라지고 있다. 10년물 국채금리도 5.1bp 뛴 4.463%에서 움직이고 있다.
오히려 시장에서는 2027년 금리 인상 가능성까지 반영하기 시작했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 페드워치에 따르면 시장은 오는 12월 연준이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할 가능성을 30% 이상 반영하고 있다. 이는 하루 전 21.5% 수준에서 크게 높아진 것이다.
특히 이날 케빈 워시 연준 의장 지명자가 연준 이사직 인준을 통과하면서 시장의 관심은 새 연준 체제의 통화정책 방향으로 쏠리고 있다. 다만 월가에서는 새 지도부가 들어서더라도 유가와 물가가 잡히지 않는 한 공격적인 금리 인하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크리스 자카렐리 노스라이트자산운용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인플레이션이 잘못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 고용시장도 견조하다”며 “연준이 가까운 시일 내 금리를 인하하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엘런 젠트너 모건스탠리웰스매니지먼트 수석 이코노미스트도 “근원 CPI 상승은 높은 에너지 가격이 경제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며 “새 연준 지도부가 들어선다고 해서 즉각적인 비둘기파 전환이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현실을 확인시켜준다”고 분석했다.
다만 일부에서는 시장이 이미 금리 인하 기대를 상당 부분 접은 만큼 추가 충격은 제한적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팀 어바노비치 골드만삭스자산운용 계열 이노베이터 ETF 전략가는 “시장은 이미 올해 금리 인하 가능성을 상당 부분 가격에서 제거한 상태”라며 “10년물 국채금리가 4.5% 아래에 머무는 한 증시에 치명적인 부담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9월부터 금리인상 가능성이 반영되고 있다. (그래픽=페드워치)
지정학 리스크와 별개로 이번 주 예정된 미·중 정상회담도 시장의 또 다른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이란 전쟁보다는 무역 문제를 우선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양국 정상은 관세 문제와 대만 군사 지원, 희토류 공급망 문제 등을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
시장에서는 미국과 중국 간 희토류 및 반도체 공급망 협상이 향후 AI 반도체 랠리 방향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개별 종목 가운데 의료보험업체 휴매나는 번스타인이 목표주가를 36% 상향 조정한 영향으로 7.7% 상승세를 보였다. 바코드 스캐너 업체 지브라 테크놀로지는 제조 자동화 수요 확대 기대 속에 연간 매출 성장 전망을 상향 조정하면서 11.4% 급등했다.
반면 게임스톱은 이베이가 560억달러 규모 인수 제안을 거부했다는 소식에 3.5% 하락했다. 원격의료 업체 힘스앤허스헬스는 1분기 매출이 시장 예상에 못 미치고 깜짝 손실을 기록하면서 14.1% 급락했다.
언더아머는 NBA 스타 스테픈 커리와의 협업 종료 및 중동 전쟁 관련 비용 부담 여파로 올해 실적 전망이 기대에 못 미치면서 16.7% 급락했다. 웬디스는 행동주의 투자회사 트라이언 펀드 매니지먼트가 비상장 전환을 추진 중이라는 파이낸셜타임스(FT) 보도에 16.9%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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